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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pr 21. 2022

인생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그것이 또한 죽음을 준비하는 법이기도 하기에

    호스피스 완화의학 전임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억나는 환자분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오늘은 그중 두 분에 관한 추억을 나란히 기록해 볼까 한다.





    광둥어를 하시던 80대의 Q 할머니는 2년째 혈액암으로 투병 중이셨다. 젊은 시절 자녀분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봉제공장 등에서 일하시며 열심히 사신 플러싱(뉴욕에서 중국, 한국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대표되는 뉴욕 아시안 노동 이민 1세대들의 이민사를 온몸으로 살아내신 분이시다. 할머니의 그 희생과 뒷받침으로 할머니의 자녀분들과 그 손자손녀 세대는 미국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여느 미쿡 환자분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의사결정이 지극히 수동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랑 면담 중에도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잘 모르겠고 나는 이미 오래전에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니 자세한 건 우리 손녀랑 이야기하라고 손을 내저으시며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손녀에게 맡기셨다(이런 것을 의료 결정 대리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나고자란 나는 이런 할머니의 행동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지만,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깊이 존중하는 서양의 환자들에 익숙한 나의 교수님은 이런 할머니의 행동을 매우 신선하게 여기며 할머니 병실로 광둥어 통역사를 불러서 할머니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자고 하셨다(미국 병원에서는 보통의 경우 전화 통역 서비스를 사용한다).  

  광둥어 통역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우리 팀에게 할머니는, 첫 몇 질문에는 대답을 곧잘 하시다. 아 아까 내가 다 말했잖아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하시더니 다시 우리 손녀에게 물어봐라고 하시고는 돌아누워 버리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인한 회피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날 수가 있지만, 내가 본 바로는 할머니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정말로 여한이 없으신 것 같았다. 할머니의 그 결단력과 인생에 대한 초연함에 경탄하는 나의 교수님을 보며, 그래, '때가 되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떠난다'라는 안분지족의 동양적 사고가 서양에서는, 특히나 인간의 욕망의 정점에 있는 뉴욕시티에 있는 이 월드클래스 암병원에서는 낯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깡마른 몸매에 금발머리의 전형적인 백인 미인 R 씨는 이름 들으면 알만한 유력한 언론인의 부인이었다. R 씨의 암은 다행히 완치되었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나의 외래 지도교수님께 통증 관련 진료를 계속해서 보고 계셨다. 뉴욕 외에도 집이 있으셔서 다른 집에 머무실 때는 그곳에서 유명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시지만 우리 교수님을 신뢰하셔서 계속해서 원격 진료로 진료를 받고 계셨다. 우아한 교양과 넘치는 품위 인상적이었던 R 씨는 예민한 체질이라 새로운 약을 쓰거나 약의 용량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그런 만큼 자신의 케어에 깊이 관여하여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셨다.  번은 통증이 너무 심하여 마약성 진통제를 쓰게 되었는데  약을 드신  얼마  있어 기억 상실이 발생했다고 하시는  아닌가. 나도 깜짝 놀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낮잠을 주무시다 잠깐 깨어 남편과  마디를 주고받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잠깐 깨어 남편과 대화한 사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 놀랐다고 하셨다. 마약성 진통제를 썼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흔하지는 않지만 아주 드문 일도 아니라 바로 약을 중단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종종 그런 것 같은데... 앗, 그럼 나도 일과성 완전 기억상실(Transient global amnesia) 인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접하게 되는데 어떤 문제는 정면돌파로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고, 어떤 문제는  잡아 잡숴~ 하고 나를 내어주어야 하며, 어떤 문제는 묵묵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저절로 해결이 되기도 한다.   어릴 때는 어떤 문제든지 결자해지의 열심으로 내가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굳이  문제들은 내가 '해결'했다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혹은 주변 환경이 바뀌면서 저절로 풀린 것도 많은  같은데.

   좀 더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이 쌓인 나는 어떤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을까. 내 안에는 안분지족의 평안함이 자리 잡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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