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로운 뉴욕의사 May 14. 2022

어메리칸 효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우며 열과 성을 다해 어머니를 간호하던 V 씨

     고령의 U 할머니는 대상포진으로 인한 통증으로 입원을 하셨다. 완전 관해(더 이상 암의 흔적이 보이지 않음)가 된 지 이미 20년이 다 되어가던 U 할머니가 아직도 암 전문 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까닭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세계 최고의 암병원으로 손꼽히던 병원 중 하나이다 보니 이런 사람이 또 아주 드물지는 않아서 뭐 그러려니 한다. 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한 분은 의료계에서 일하시고 다른 한 분은 변호사로 꽤 큰 법률회사의 고위직에서 일하시는 분이셨다. 할머니의 병실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분은 주로 이 변호사 따님이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사실 이 분에 관한 이야기이니 V라고 이름을 붙여 드리자.


    V 씨는 변호사답게 말을 참 잘하셨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만 또 너무 압박하는 것 같지는 않게 한 줌의 감성을 둘러쳐서 말하시는. 게다가 관찰력도 좋으셔서 할머니의 상황을 우리가 오면 아주 잘 설명해 주셨다.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변호사 일만 하셔도 하루가 72시간이라도 모자랄 분이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할머니의 병실에서 같이 주무시며 병간호를 한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 효녀는 U 할머니와 옆 아파트에 나란히 사시는데, 더 놀라운 것은 입원 안 했을 때도 할머니와 같이 잤단다.   


      그렇게 K- 효녀의 대표 주자, 공양미 삼백석의 심청 뺨치는 어메리칸 효성으로 할머니를 간호하던 V 씨의 열성은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덕택에 U 할머니의 진료는  쉽지 않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약을   보고 신경 차단술까지  보았지만 V 씨의 눈에 할머니의 통증은 차도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해 보면 U 할머니랑 직접 이야기해  기억은 별로 없고 강렬한 눈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V 씨의 얼굴만 생각난다. 그런데 그런 V 씨의 속마음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어느 날인가 U 할머니가 무슨 검사를 받으러 갔는지 V 씨만 혼자 병실에 있던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가 낮에는 그렇게  로펌에서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면서 밤에는 이렇게 엄마 돌보려니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이런 말을 하셨다.


 엄마가 처음 암 진단을 받은 20년 전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그날, 나는 앞으로 절대로 엄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나는 우리 엄마와 만 15년을 조금 넘게 같이 살았다. 전형적인 희생의 아이콘 K-마더인 우리 엄마는 일하시면서 언니들과 나를 기르시며 2인분의 삶을 살아가느라 정말로 당신의 삶은 1도 없는 인생을 사셨다. 그런데 그렇게 길러 놓은 딸들 중 엄마의 지척에서 살며 엄마와 삶을 나누는 딸은 하나도 없다. 나이 들면 다 필요 없고 옆에 있으면서 일상을 나누는 자식이 최고라는데, 그렇게 엄마 자신을 갈아 넣어 기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보물 같다던 그 딸들은 파랑새처럼 각자의 꿈을 찾아 날아가버리고 엄마는 홀로 남아 자신의 노년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U 할머니의 케이스는 고난도 통증 조절 케이스로 나중에 케이스 스터디에도 올랐다. 글쎄, 까다로웠던 것이 할머니의 통증이었는지 가족의 기대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우리 과에서 별로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케이스가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V 씨의 그 까다로운 요구들이 나한테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 안에는 태평양 건너에 있는 우리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를 기울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