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로서의 일과를 마친 패터슨은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마을의 바(Bar)로 향한다. 주인장과 잡담을 하며 맥주를 마시는 일은 시 짓기 이외에 패터슨이 가진 유일한 낙이다. 패터슨이 주인장과 마주하여 앉는 자리, 그 옆에 항상 놓여 있는 체스 판, 체스 판 위에서는 흡사 방금 전까지 경기가 벌어진 듯 체스 핀이 이리저리 흩어져 섰다. 누구와 체스를 두냐는 패터슨의 질문에 주인장은 ‘혼자서’ 둔다고 말할 뿐이다. 말을 맺은 주인장은 핀을 옮기려다 머뭇거리고, 패터슨은 무언가 마음을 스친 듯 한동안 체스 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홀로 체스를 두는 바 주인장
바 주인장의 체스 게임에는 시인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숙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체스 상대가 없으므로 주인장은 자유로이 검은 핀이 이기게도, 하얀 핀이 이기게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킹이 사로잡힐 때까지 체스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혼자만의 체스는 상대와의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여유로운 게임인 동시에, 스스로 정해진 규칙을 지키면서, 게임을 마무리하기 위해 결국에는 한 편을 죽여야만 하는 고독한 게임이다. 한 편의 결핍이 필연적인 것이다. 시인 역시 그의 삶 속에서 자유로이 시상을 떠올리지만, 작게는 운율에서부터 크게는 생활 속 결핍에까지 제약을 느끼고, 이 모두를 일정한 시각으로 프레임화한다. 이러한 대결 끝에 승부가 났을 때, 체스 판 위에서 체스 핀들이 걸어간 노정과 전략들은 체스 경기를 한 편의 기록으로 만든다. 패터슨은 바 주인장의 체스 게임을 보며 이러한 숙명을 감지했을 것이다.
특히 시인 패터슨에게 쌍둥이 모티브는 불임을 암시하는 숙명적인 결핍으로 형상화된다. 영화 속에서 쌍둥이는 서사 곳곳에 배치되어 패터슨이 품은 이뤄지지 않는, 혹은 이뤄지지 못하는 소원을 관객들에게 넌지시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로라가 침상 위에서 패터슨에게 쌍둥이를 갖는 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로 패터슨의 시선은 거리 벤치에 앉아 있는 쌍둥이 노인 형제를 포착하거나, 저녁 바에서 당구를 치는 흑인 형제를, 패터슨이 운전하는 버스에 탑승한 어린 쌍둥이 자매를 포착한다. 얼핏 보기에 안정되고 만족스런 삶을 사는 패터슨이지만, 그는 많은 패터슨 시민들 사이로 보이는 쌍둥이 형제자매에 시선을 던지고, 화면은 그들을 클로즈업한다. 어쩌면 근본적으로 로라와의 사랑을 대를 이어 전할 수 없기에, 쌍둥이들을 바라보는 패터슨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하다.
패터슨의 눈에 비친 쌍둥이 소녀 버스 승객
쌍둥이 모티브는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지만 패터슨은 이를 집요하게 쫓지 않는다. 제일 가슴 깊이 응어리진 결핍이긴 하지만 매일같이 쓰이는 주인공의 시편들이 이미 생활 속에서 느끼는 모든 결핍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정황은 없지만 많은 결핍이 은연중에 나타난다. 시인은 그의 시에서 자신이 지각하지 못하는 차원-자신 혹은 타인들의 심연일 수도 있을-이 많음을 시인하며
Then later you hear
There’s a fourth dimension: time
Hmm
Then some say
There can be five, six, seven…
부재하는 아이들의 비통한 목소리를 힘껏 끌어다 아내를 향한 사랑의 목소리로 옮겨 담는다
You’d see how much my chest and head
Implode for you, their voices trapped
Inside like unborn children fearing
They will never see the light of day
결핍에 집착하여 그것을 애써 채우려고 하는 순간 하루하루마다 패터슨이 짓는 시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시는 일상을 그대로, 결핍까지도 감싸 안으며, 담아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결핍의 가치는 시 속에서 새로이 발견된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가장 극적인 결핍은 패터슨의 시를 적은 공책이 애완견 마빈에 의해 훼손된 일이다. 모처럼 로라와 함께 극장 구경을 다녀온 패터슨은 집에 돌아오자 현관에 그의 시집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 상황을 보게 된다. 범인은 그날 자신과의 산책을 건너뛴 주인에게 심통이 난 마빈. 로라는 마빈에게 차고로 쫓아내는 엄벌(?)을 내리지만 패터슨이 느끼는 허탈함은 좀체 가시질 않는다. 시를 통해 단조로운 일상에 새 의미를 부여해 나가던 패터슨이지만, 시집의 훼손은 그런 시에 대한 현실의 정면 도전과도 같이 다가온다.
시는 과연 읽는(讀) 것일까 읊는(吟) 것일까,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패터슨도 우리도 뒤숭숭한 마음으로 감독의 물음을 따라가 본다. 혼란스런 마음을 잠재우려 공원 벤치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던 그에게 한 일본 시인이 다가온다. 그는 패터슨 옆자리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을 꺼내 든다. 그가 꺼낸 시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패터슨, 일본 시인은 옆자리의 시선을 느끼고 패터슨에게 말을 건넨다. 시인입니까, 그의 물음에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라고만 대답한다. 시를 쓴 적은 있지만 시인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쓴 시를 암송하고 있던지 시를 적어둔 책이 있어야 할 터이다. 아침에 로라에게 한 말과 같이 그에게 시는 이제 ‘물 위에 쓴 글자들’ 일뿐이다. 패터슨의 직업을 들은 일본 시인은 말한다, 그거 시적이군요. 그는 짧은 대화 끝에 패터슨에게 빈 공책을 선물하며 덧붙인다, 흰 종이는 많은 것을 의미하죠.
결핍에 대한 감독의 물음 끝에는 결국 다시 시가 있었다. 패터슨은 비록 시집을 잃었지만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시각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기에 남들과 다른 시각이 있는 것이며, 일본 시인도 일본인으로 살아가기에 특별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누구나 스스로의 생활을 그대로 써 내려갈 때에 시라는 세계가 탄생한다. 시로 숨을 쉰다는 일본 시인의 말은 그가 시에 대해 품은 애정뿐 아니라, 시가 곧 일상과 밀착되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주는 감독의 메시지이다. 과연 시의 어떤 점이 일상을 관조하며 일상의 결핍을 수용케 하는가, 그것은 날마다 시가 ‘지금’이라는 순간에 쓰인다는 사실이다.
시 노트를 잃은 패터슨에게 한 일본 시인이 다가온다
마을 ‘패터슨’의 풍경과 주민들은 원래 변함이 없지만 패터슨이 쓰는 시는 날마다 다르다. 그리고 새로운 시는 이전의 시를 의식하지 않고 쓰여 왔다. 지금 그가 관찰하는 것이 이전과 다르고, 지금 그의 마음이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패터슨이 엊저녁 시집을 잃은 일과 이튿날 공원에서의 우연한 만남도 모두, 새로 선물 받은 빈 공책 위에 시로 표현될 수 있다. 빈 공책은 패터슨에게 시집을 잃은 사건에 대한 위로인 동시에, ‘지금’ 쓰일 시로 이 결핍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패터슨은 계속 살아갈 것이고, 그의 관찰과 사유도 계속된다. 따라서 그의 시 또한 계속 쓰일 것이다.
일본 시인과 헤어진 후 패터슨은 깊은 눈길로 어떤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러고는 기꺼이 새 공책에 적었을 법한 새로운 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시가 일상의 어떤 결핍도 수용해 낼 수 있음을 확인한 듯, 공원에서 돌아오는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