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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Aug 25. 2020

[독서노트] 창작에 대하여(論創作)

(가오싱졘(高行健) 지음, 박주은 옮김, 돌베개)

18.01.25 완독


내가 속한 단과대학 연구소에서는 매달 한 번 꼴로 중국 관련 서적에 대한 강독회를 연다. 중문과 교수님 한 분이 주최하여 열리는 작은 규모 행사이다. 12월에는 교수님의 사정이 바빠 강독회를 열지 못했는데, 그때 이 책이 주제 도서로 선정됐다. 종강 날까지도 소식이 없자 시나브로 내 기억 속에서도 잊혀가다, 일주일 전인가, 친한 대학원생 형으로부터 1월 26일에 그 연기됐던 강독회가 다시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얼른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빌려서는 사흘에 걸쳐 다 읽었다. 마음만 잘 먹으면 하루에도 다 읽을 수 있을 ;분량이긴 하다.


가오싱졘의 작품을 고등학생 때 읽은 기억이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가오싱졘의 <버스정류장(车站)>, <야인(野人)> 등을 읽었다. 그 작품들은 짧은 제목만큼이나 종래 중국문학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험성을 지니고 있었다. 희곡작품 속 대사와 지문 위를 눈으로 달려 나가며, 작중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어 얘기해보기도 했고(도서관에서 조용히 속으로만), <버스정류장>에서의 다성부 구조(인물들이 동시에 말할 때 각자 음역대를 나누어 대화에 화음을 부여하는 시도)와 <야인>에서의 그림자를 통한 의미 형상화 수법에 신기해 했다. 실은 가오싱졘 외에 다른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루쉰 이후,  스져춘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가오싱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가 중국에서 배척당한 작가이며 작품 또한 중국 내에서 출판금지당했다는 사실을 안 시점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스탠포드 대학 연극동아리 '비어극사'에서 공연한 <버스정류장>의 한 장면, 촬영: 张寒松

4년도 더 지나서 이렇게 다시 그를 접한다.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인터뷰한 내요와 수필들을 통해서 그를 보게 되니 확실히 이전과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실험성'은 단순히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었다. 가오싱졘의 실험성이 주제를 제한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일환이라는 해설을 읽었을 때, 중국의 서슬 퍼런 70년대 분위기 속에서도 그가 품은 문학관이 견고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덧붙여 강조하는 말은 문학이 무엇인가에 관해 심오한 화두를 던진다.


문학은 개인의 목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연한 얘기가 아닐 것이다. 수록된 그의 글들 전반에 걸쳐 개인의 목소리의 실현 여부가 문제의식으로 드러나 있다. 그 세부 내용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할 수 있겠지만 나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을 꼽아 보았다.


정치적 입장을 작품에 담으면 안 된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에 태어나 문화혁명기 때 청년시절을 보냈고, 줄곧 공산당으로부터 창작의 자유를 제한받다가 망명한 작가이다. 그가 망명한 지 2년 후에는 천안문사건(6.4항쟁)이 발발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힌다. 2000년대에 들어 한 열린 한 대담에서도 그는 망명 전의 중국을 생각하면 안 좋은 추억뿐이라며 다시 중국에 갈 뜻이 없음을 밝혔다. 이와 같은 그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정치성이 없는 '순수예술' 추구가 납득이 간다.

가오싱졘(1940~), 현재는 문학 분야보다도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순수예술을 펼칠 공간을 찾아서, 정치적 입장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서 중국을 떠난 그가 원하는 대로 자유를 얻었는지 반문해 보자. 중국에서와 달리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지켜지는 사상의 자유나 발언의 자유야 두 말할 것도 없지만,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나는 어렵다고 본다. 민주주의 체제가 원리대로 작동하는 사회일수록 친-정부 반-정부를 포함한 모든 사고방식과 이념이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낸다. 앙드레 지드와 사르트르가  한때 친공산주의였다는 점을 상기해도 좋겠다. 여럿의 목소리가 일제히 커지고 많아질수록 작가의 개인적인 도덕관과 사상은, 설령 '독야청청'하리라고 해도, 서로 교집합을 만들어 낸다. 혹은 작가 본인 목소리가, 독자들에 의해 정치적인 목소리로 커질 수 있다. 모르는 사이에라도, 무슨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는 말은 단연코 작품에선 지양해야 하나, 가오싱졘은 '정치'가 아닌 '정치성'에 대해서도 과민한 듯싶다.


시류에 맞추려는 의도로 새로움을 추구하면 안 된다: 나아가 그는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의도로도 새로움을 추구해선 안 된다고도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확실히 현대와 같은 '기술복제시대'에서는 발달된 산업기술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력과 시간을 줄여준다. 이에 따라 새로운 방법론과 유통기술(얼마나 대중화할 수 있는지)도 발달하고 있다. 문제는 작가의 사유에 앞서 새로움이 주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수용자와 소통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소통은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작가와 그걸 보고만 앉은 수용자의 상황이 아니다. 작가의 생각, 더 작게는 창작 당시의 작가의 감정과 사소한 느낌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전달한다. 수용자는 그로부터 작가를 읽어내고 스스로에 비추어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시류를 따르려는 의도와 새로움을 추종하는 자세는 작품 사이 쌍방향 소통을 단방향 소통으로 전락시킨다. 앞에서 말한 뽐내는 작가와 멍하니 보는 수용자, 그 끝에 작가는 소멸되고 작품은 소유품이 된다.


미학이 예술의 뒤를 따라 나왔을 뿐이라고 했던 가오싱졘은 비평가들을 앞에 두고서도 뼈 있는 말을 던지고 있다. 예술을 논할 때 정치와 예술의 순서가 뒤바뀐 시대, 기술과 예술의 순서가, 혹은 사상과 예술의 순서가 뒤바뀐 시대에서 예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먼저 작품을 보고 작가를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과 하와처럼 예술 자체로부터 유리될 위기 속에, 그의 말과 행적은 다시 예술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조그만 이정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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