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견만리하다: 관찰력이나 판단력이 매우 정확하고 뛰어나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잘 알다
국어사전에 적혀 있는 이 어휘는 결코 <명견만리>를 지은 사람들의 자화자찬은 아닐 것이다. 발전하는 누구든지 시선을 전방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옮길 때, 그 사람은 스스로 발전하기를 관둔 것이다. 무엇인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발전시키려는 대상보다 더 나아가 목표가 되는 기준점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눈을 자신이 이미 성취한 것들에게로 돌린다면 그보다 더 나아진 상태의 기준점을 잃게 된다. 그러면 지금껏 나아가던 길이 맞는 지도 결국 의심하게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롤모델도 기준점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책은 롤모델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말해오지 않았는지? 새 시대를 예측한다는 내용들이 안락한 방석에 앉듯 예전부터 쌓여 온 시대적 조류에 무임승차하여, 이랬으니 앞으로는 반대로 이럴 것이다,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하는 말만 툭 던지는 것은 아닌지? 어찌 보면 혁신은 바슐라르가 논한 인식론적 단절(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은 기존 과학지식의 축적에서 나오는 게 아닌, 기존 과학지식계와의 단절을 통해서 나온다는 가설)을 효과적으로 함축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궁벽한 시골 출신의 CEO 마윈에 이르기까지, 그런 혁신이 넘쳐흐르는 시대가 4차 산업혁명기로 자주 명명되는 현재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인간 진보의 역사가 지식의 연속적인 축적이 아닌 상상력과 새로운 패러다임과 같은 불연속성으로 이루어졌음을 주장했다.
마땅히 우리는 우리가 일궈낸 수확을 제쳐두고 현재를 살며 새로운 개간지를 찾아 주위를 살펴봐야 한다. 그 개간지에서 일궈내는 더욱 탐스러운 수확물을 기준으로 더 탐스러운 수확의 모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책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연속적이고 즉각적인 혁신들을 큰 주제들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 행간에는 우리로 이 책을 혁신의 마중물로 삼아 우리가 '명견만리'하는 능력을 가지길 바라는 간절함이 문단마다 담겨 있다. 고로 '명견만리'라는 제목은 독자들을 향한 간절한 염원인 것이다.
'~이다'라는 신념이 낳는 폐해는 앞서 소개한 책인 <졸업선물>을 읽고 서술한 바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갖는 어법을 나는 가정법 '~일 수도 있다'로소개했다. 이와 비교하여 <명견만리>에서는 '~에 따르면'이라는 어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증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어법을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용도로만 인식해서는 안된다. 정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논지와 맞는, 시너지 효과를 내 줄 정보를 찾는 기술이 환영받는다. 객관적인 정보가 논지 속에 적절하게 배치될수록, 논지와 맞는 정보가 많을수록 지리멸렬한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다. 경찰서 강력반이 범죄조직 소탕에 앞서 주요 조직원 및 관계망 등을 스크린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작전의 당위성이나 긴급성이 읽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에 따르면'이라는 객관성 앞에서는 누구나 수평적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거론한 로고스(합리성)의 설득력을 얻는다.
이 책이 보여주는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설득력과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회의감이 든다. 물론 <명견만리>에서의 내용들이 충분히 설득적이지 않다거나 독자가 수용하기에 내용이 버겁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인터뷰 인용이나 주제 관련 도표, 현장 사진 등은 다루는 문제를 독자가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며 가독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이 도서만 놓고 봤을 때 다른 도서들과 차별화된 '책의 매력'이 있는 지의 여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책은 화제가 됐던 TV 프로그램을 글로 엮어낸 성과물이다. 내용을 놓고 본다면 TV 프로그램에서 전개됐던 방식과 별 차이가 없다. 만일 선행했던 TV 프로그램이 없이 이 책만 출간되었더라면 지금 알려진 만큼 화젯거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KBS <명견만리> 녹화 현장, 출처: pdjournal.com
17년 여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 책을 소개했었다. 그 때문에 <명견만리>를 TV로 봤던 사람뿐 아니라 보지 않았던 사람까지 책을 접하는 계기가 생겼을 듯하다. 하지만 영상매체가 문자매체보다 더 대중성을 띠고 더 큰 파급력을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특히 요즘 COVID-19로 인해 집콕이 늘어나며 유튜브 등의 1인 미디어 소비율도 더 증가한 걸 보면), 도서 <명견만리>가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상매체가 보여줄 수 없는 깊이나 새로운 정보를 담았어야 했다. 편찬자의 안일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