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환 Oct 03. 2020

[독서노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진우 지음, 흐름출판)


"폭력, 즉 물리적 폭력은 수단이며,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개념상 전쟁 행위의 본래의 목표가 된다." (p.36)


스스로 반전주의자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책을 읽으며 어떻게 전쟁 자체를 용인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과연 역사에서 '반전'이라는 슬로건 하나로 전쟁이 평화롭게 사라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되물었다.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반전주의의 허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야만적 요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무익하고 그릇된 노력이다." 전쟁은 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낳지만 그것이 전쟁의 본질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전쟁론>이 말하는 요지는 이런 게 아닐까: 전쟁에는 확실히 야만성과 잔인함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야만성과 잔인함을 회피하려는 태도는 적의 의지를 가중시키거나 우리의 피해를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전쟁의 표면적인 요소를 직시하고, 나아가 그 너머에 있는 전쟁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K. 클라우제비츠는 자국 정부가 나폴레옹 편으로 돌아서자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로 넘어가 장교가 된다. 이러한 급진적인 성격으로 그는 경력 면에서 평생 견제를 받는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길지를 궁리해야 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 앞에서, 나는 내심 전쟁을 하지 않고 승리할 방법을 열심히 떠올리고 있었다. 역사책에서 본 고려 시대 서희의 담판을 떠올리기도 하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떠올리기도 했다. 두 사건 다 전쟁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을 외교로서 무사히 끝낸 사례가 아닌가? 이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적 목적'을 배제한 전쟁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으며, 나아가 상대편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오면 자연히 방어 태세를 갖추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들은 바, 서희는 송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라는 소손녕의 요구를 역이용해 오히려 강동 6주를 고려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고려는 서희의 담판 이전에 이미 중랑장 대도수가 안융진 전투에서 거란에 승리하여 어느 정도 우세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미국이 쿠바 미사일 기지 완공 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자 소련이 한 발 물러선 일도, 실은 쿠바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는 조건으로 이탈리아와 터키에 설치된 미국의 미사일 기지를 동시에 철거한다는 확답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실제로 양국은 자국의 미사일 기지를 동시에 철거했다. 이로 짐작컨대 전쟁은 (침략-피침략 관계를 떠나)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국가 안보를 위한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극단적이나마 하나의 제스처로서 국가적 의지를 최대치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저자는 왜 <전쟁론>에 주목하고 있는가. 저자 서문에 따르면 사회 전분야에서,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며 전쟁 양상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시장형태와 고품질의 서비스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타기업들과 전쟁 중이며, 정치에서도 정당 또는 정치인들이 여러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타 정당 및 정적들과 전쟁 중이다. 좀 더 시야를 좁혀보면 사내에서도 추진 중인 프로젝트 현안 결재를 놓고 여러 팀이 암투를 벌이며, 대학에서도 제시된 주제들을 가지고 조별 과제를 수행할 때 조금이라도 쉬운 주제들을 따내려고 조끼리 눈치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이렇듯 전쟁이 만연한 사회를 클라우제비츠는 어떻게 바라볼까. 지극히 '정상'이라 할 듯싶다. 흔히들 생각하는 전쟁은 군사와 각종 무기로 적과 싸우는 상황이지만 이는 전쟁의 본질이 아니다. 전쟁의 본질은 정치적 목적 달성이다. 이 목적에 따라 여러 전쟁이 정치적 수단이 되고, 그 전쟁들은 다시 개개의 작은 목표를 만든다. 때로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친화력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당장 주변만 보더라도 촉박한 기한 내에 끝내야 할 과제,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할 수 없는 일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넓은 의미의 전쟁은 불가피하며, 천태만상의 전쟁을 관통하는 일정한 법칙이 요구된다.


시대가 흐르며 전쟁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졌지만, '법칙의 강요를 통한 정치적 목적 달성'이라는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이상적 전쟁현실적 전쟁의 차이를 서술한다. 이상적 전쟁은 전쟁 자체를 위한 전쟁이다. 적과 아군의 전투력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고, 두 진영이 힘의 균형을 이루어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쉬지 않고 싸우는 전쟁이다. 단, 이러한 전쟁은 현실에서 여러 가지 마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클라우제비츠는 그중 중요한 요소로 우연을 들고 있다. 우연은 전쟁이 수학적이거나 통계학적으로 완전히 분석될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지휘관의 통찰력 및 군인 한 명이 개별적 전투 상황에서 매 순간 요구되는 이성적 판단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때문에 현실적 전쟁은 세 가지 명제의 제약 아래 놓인다.


1. 갑자기 일어나며, 과거의 정치 세계와 무관한 완전히 고립된 행위로써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 단 한 번의 결전(전쟁 결정)이나 동시에 일어나는 여러 결정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3. 그 자체로 완료되는 결전이며, 전쟁에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서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을 바라볼 때는 어떤 우연성에도 흔들리지 않을 기본 시각-틀, 즉 보편적 법칙을 세워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결정 이전에 목적의 성취를 위한 전략, 전략으로부터 나뉘는 여러 목표의 성취를 위한 전술, 전술 실현 수단으로써의 전투라는 세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부류는 전투를 전쟁의 모든 것으로 본 까닭이다. 아울러 그는 우회로를 모색하기보다 중심부 타격에 집중해야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근거로 이진우 교수는 한니발의 일화를 드는데,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은 지중해를 넘어 곧바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로마의 예측과는 반대로 이베리아(스페인) 반도를 통과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격한다. 얼핏 한니발의 전술은 우회로를 모색한 듯 보이지만, 그는 로마군이 남쪽 방비에 신경 쓰는 동안 북쪽의 군사력 약세를 틈타 로마 본토로 쳐들어 오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 결과 우회로를 통해 단순히 접전을 피했을 뿐 아니라, 적의 심장인 로마를 직접 공격할 전쟁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읽은 책이 클라우제비츠가 저술한 <전쟁론> 원본이 아닌 터라 <전쟁론>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하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저자 이진우 교수가 <손자병법>과의 비교를 줄여서라도 <전쟁론> 원본 해석에 조금 더 신경 써주었다면 하는 바람이 있다. 책의 구성으로는 각 장마다 <전쟁론> 원본이 일고여덟 페이지 발췌되어 있고, 역시 그 정도 분량의 저자 해설이 뒤에 붙어 있으며, <손자병법>과 <전쟁론>의 비교가 두 페이지 가량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설은 주관에 치우친 느낌이며 원본 해석이 빈약하다(고전 번역은 더욱이 표면적인 번역과 함께 어원이나 역사 배경 등을 해석한 심층적인 번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개된 <손자병법>의 발췌 부분이 <전쟁론>의 발췌 부분과 직접 대응되는 내용이 아닐뿐더러, 내용의 밀도가 얕아 <손자병법>이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분위기를 감출 수 없다. 나름 <전쟁론>에서 핵심 내용만을 엄선해 담으려고 했지만 '해석'과 '해설'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듯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노트] 돈 키호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