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환 Feb 02. 2021

[독서노트] 교실 심리

(김현수 지음, 에듀니티)


문학을 제외한 어떤 책이던 그 책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 이들 독자에게 책의 내용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일 테다. 때로는 상정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다른 방향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독교를 비판할 요량으로 성경을 펼쳐 들었는데 오히려 읽다가 회심하고 신학에 귀의한 사람도 있고,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 서적이었으나 헉슬리 등의 독해를 거쳐 20세기 전반을 휩쓴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으로 가지를 뻗기도 했다.


이런 예시들은 실은 너무 거창하지만, <교실 심리> 역시 교사를 독자로 상정했음에도 교사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상당한 논의점을 던져줄 만하다. 저자는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동시에 한 대안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렇듯 '애매하게 안과 밖의 시선을 모두 지니고 있는(p.5)' 저자의 특성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갈등과 사제지간 심리적인 갈등을 우리에게 차분한 어조와 풍부한 예시로 보여준다. 한 번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또 한 번은 교사들의 입장에서 갈등 상황 이면에 가려진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교사뿐 아니라 학생이나 학부모에게도 함께 갈등에 처한 상대의 마음을 냉철히 이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라는 특성에 따라 학생들이 맺는 또래 집단이 어떻게 다른 성격을 보이는지-어째서 남자아이 집단은 갈등이 오래가지 않고 수시로 구성원들이 바뀌는 반면, 여자아이 집단은 갈등이 오래가면서도 구성원의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지-와 같은 문제가 있다. 저자는 발달심리학적 지식교육학적 지식, 풍부한 분석을 동원하여 이를 교사와 학부모가(혹은 학생도) 모두 납득하도록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현학적이지 않고 평이하게 풀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교실 뒤 게시판은 수업에 대한 소통과 학급의 피드백이 동시에 이뤄지는 공간이다.(p.54) 출처: habastar.tistory.com


내 경우에도 교사학생이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처음 일독할 때에는 '학생' 입장에 나 자신을 투영하여 읽었다. 그러다 보니 저자가 교사에게 제안하는 교실 프로젝트들이 학생들에 얼마나 효과를 줄 지에 회의적이었다. 두 번째로 재차 읽을 땐 현재 학원 강사로 아이들을 짧게나마 만나고 있는 배경을 살려 '선생님' 입장에 나를 투영시켰다. 그랬더니 저자의 제안들이, 학생뿐 아니라 지친 선생에게도 에너지를 주기 위한 의도였음을 깨달았다. 교사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교실이고(p.8), 교실이 무덤에서 축제로 변하려면 교사부터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와 자신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p,240).


학생 입장에서 읽을 때 나는 초중고 시절 거쳐갔던 여러 선생님들을 기억했다. 학생일 때는 적어도 교실에서는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도 유쾌했던 분위기만 남고 목소리라고는 선생님의 목소리만 남는가 보다. 여러 선생님들 중에서 내겐 특히 초 3 때와 초 4 때의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전자는 내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상적인 선생님 상(像)으로 느낀 분이고, 후자는 애초에 선생님이 되면 안 될 사람으로 느낀 분이다. 초 3 때 선생님이 남기신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선생님이 출장 간 틈을 타 반장과 부반장이 친구에게 강압적으로 유세를 떨었고, 이 사실이 발각되어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학급 임원들의 기본자세를 힘주어 말씀하셨다.


"반장을 비롯한 학급 임원들은 학우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봉사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럼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더 높죠?"
"아니야, 선생님은 너희랑 같은 위치일 뿐 더 높은 위치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돼. 너희 같은 학생이 우선이거든."


돌이켜보면 그분은 급식실에서 식사할 때도 한 주에 두 번 이상 우리들 옆에 앉으셨다. 교직원 좌석이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함께 식사하시며 우리에게 개인적인 질문들을 물어보며 한 명 한 명을 알아가려 노력하셨다. 참 가슴에 남는 분이다. 이와 반대로, 초 4 때 선생님은 완전히 반대 스타일이셨다. 그분이 남긴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건 "뭐가 어째?" 하는 날카로운 한 마디뿐이다. 우리가 잘못한 일에 대한 조금의 해명이라도 할라 치면 바로 '뭐가 어째'였다. 또 한 친구가 실내화짝으로 다른 친구를 때린 일이 있다. 선생님은 모든 급우가 보는 앞에서 똑같이 실내화짝을 들고 가해 학생의 얼굴을 '가격'했다. 당신이 수틀린 날엔 항상 손에 플라스틱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으므로 모든 학생이 그분에게 안 맞은 적이 없다.

저자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초 3 때의 선생님은 교실 기후(각기 다른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이 형성하는 교실 분위기)와 프레네의 격언 '교사는 실패할 수 있지만 학생의 배움은 실패해서는 안된다(p.240)'를 염두에 잘 두던 사람, 초 4 때의 선생님은 교실을 레슬링 경기장으로 보며 모든 학생을 '정복해야 할 라이벌'로 본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소진 증후군(burn out)을 겪게 된다.


비록 학교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원에서 수업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터라 감사하게도 조금은 교사의 입장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초 3 때의 선생님은 항상 자신이 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늘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학생들의 자아가 성장하는 방향으로(이기적인 방향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을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책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p.231). 어떤 직업이든 빨리 가기보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했던가. 후일 선생님께서 모 초등학교에 교장으로까지 부임하셨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반갑던지. 초 4 때의 선생님은 아마 아이들로부터 전에 받은 상처가 컸거나 야망이 비대해서 영웅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진 증후군(burn out)이었을 수도 있는데, 이는 '내 안에 없는 것을 이야기하'다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p.220). 가정과 교실 사이에서 정서의 균형이 깨졌거나, 교사의 '직무'가 막중해서 기관 업무에 매몰된 '기관 증후군'에 걸린 이들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분은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어 다른 학교로 전근 갔다. 그리고 학생들 중 아무도 그 선생님 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인 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여러 상황의 진단과 해결책을 내리고는 있지만, 교사의 문제에 관하여는 다소 피상적인 해결책만 제시하고 있다. 교사들 간 '격려 모임'을 만들거나 긍정적 교육태도 등 '인식 전환'을 요구하는 점은, 학생들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과는 사뭇 대비된다. 교사들만을 위한, 교사를 대상으로 한 책의 출간도 내심 절실해진다.


(초등학교 3학년을 행복했던 한 해로 기억하게 하신 국명남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노트] 0(zero)의 발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