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스럽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난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다면 우리 엄마는 아주 소녀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좋은 걸 아주 좋다고 말하는, 예쁜 걸 아주 예쁘다 말하는 사람이었다. 석양 참 예쁘지, 혹은 물소리 참 좋지, 비에 젖은 흙 내음이 향긋하지, 하면서 길가를 돌아다니면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저 꽃은 무슨 꽃인지를 줄줄 읊었고 가지에 달린 산딸기나 진달래꽃, 찔레순을 뚝뚝 따서 내 손에 쥐어주곤 했다.
그녀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분명 좌절했음직한 일이 생겨도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지.” “최악은 면했지, 안 그래.” 하며 크게 상처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항상 내 손을 잡고 정의로운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다. 함부로 뒷담 하지 말고, 혼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고, 가진 것은 나눠야 한다고. 도덕책을 집어삼킨 것 마냥 옳은 것들에 대해 열거했고 어린 나는 그녀의 말을 고지식하게도 온전히 흡수했다.
‘정의롭다.’ 상당히 교과서적인 단어. 너무 숭고해서 말하기 낯 뜨거운 단어. 대부분이 가진 인식이 그러하듯 난 나의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우스운 것 마냥 치부해버리는 많은 상황들을 마주했다. 그녀가 말한 소녀스러운 공상을 현재의 삶 속에서 체화하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꿈꾸는 걸 좋아했다. 어릴 적 읽은 이순신 장군의 전기가 인상 깊다며 그와 같이 되길 바랐다. 태권도를 배웠고, 검은 띠 4단을 땄으며, 발차기를 아주 잘했다. 그녀는 남자의 도움 없이도 큰 장롱을 옮겼고, 땅땅하게 닫힌 병뚜껑을 끝내 열어버리고 마는 악력을 갖고 있었다. 등허리에는 움푹 파인 골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 웬만한 운동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을까?
무려 넷이나 딸린 여식이 그러했을까.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이 그러했을까.
아침을 서둘러 차려주곤 서서 몇 숟갈 급하게 입에 집어넣고는 나가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전단지를 붙이기 위해 새벽같이 나와 꼭대기 층부터 1층까지, 그렇게 여러 채의 아파트를 오르내리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책을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몰던 모습을, 수십 권의 책을 실어 무거워진 오토바이가 이내 쓰러져 허벅지에 넓게 긁힌 상처가 생겨버린 그녀가, 오토바이 양 옆에 보조바퀴를 새로이 달고는 “이제 안 쓰러지겠지.” 하며 가볍게 웃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그녀의 손이 고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큰 손은 따듯했고 가슬가슬한 촉감이 좋았다.
강인하다는 건 아무나 될 수 없는 거였다. 그건 '매력적인 몸을 만들고 싶어서'와 같은 얄팍한 마음으로 운동하는 것과는 다른 범주의 것이었다. 오갈 데 없는 절박함이, 소중한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깊숙한 책임감이, 자신이 택한 삶을 증명해내야 한다는 고집이 그녀를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다.
소녀는 약함의 상징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런 의미로 꽤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썩 내키지 않았다. 소녀스러움을 간직한 엄마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도 소녀 같은 사람이 되려 한다.
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그럼에도 낭만을 지닌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