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명 Jan 24. 2021

장갑

나를 보호하기 위해, 너를 보호하기 위해.

     요즘 날씨가 참 춥죠? 작년 겨울은 온화했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은 더 춥고 눈도 자주 오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겨울이면 손이 많이 차서 장갑이 필수입니다. 털장갑, 가죽 장갑, 벙어리장갑 등 장갑의 재질과 디자인이 참 다양한데요, 이렇게 종류가 다양하지도 않고 끼는 목적도 다르지만 연구실에서도 장갑을 낍니다.

브랜드에 따라 하늘색, 보라색, 미색의 장갑이 있습니다. 남여 공용이고 사이즈는 XS, S, M, L, XL가 있습니다.

     위 사진의 장갑은 제가 연구실에서 끼는 장갑입니다. 생명과학 연구실에는 위험한 시약이 많습니다. 이런 물질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을 낍니다. 장갑이 너무 두꺼우면 손이 둔해져서 실험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나이트릴 또는 라텍스 소재의 얇지만 탄력 있는 장갑을 사용합니다. 저는 피부가 민감하지 않아서 아무 장갑이나 잘 쓰는데, 라텍스에 알러지가 있는 친구들은 라텍스 장갑을 끼면 손에 발진이 생기거나 가려워서 고생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좌)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2', (우)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중 한 장면

     연구자의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을 끼는 것도 맞지만, 실험의 변수를 줄이고 실험 대상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장갑을 낍니다. 만약 장갑을 끼지 않고 실험을 한다면, 병원균을 물리치기 위해 피부에서 분비되는 효소, 손에 묻어 있던 정체 모를 물질 혹은 세균이 실험 과정 중 샘플과 섞여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세포 배양을 할 때는 장갑을 끼고, 그 장갑에 70% 에탄올을 뿌려 세균을 제거한 후, 아무것도 건들지 않은 상태에서 생물 안전 캐비닛에 손을 넣어서 세포를 다루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 인해 손에 묻어 있을 세균이 세포를 오염시킬 위험을 줄입니다. 의학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팔을 깨끗이 씻고, 아무것도 건들지 않은 상태에서 장갑을 끼고, 장갑이 어디 닿을까 봐 수술 전에 팔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드라마에서 그런 모습을 볼 때, 참 비장하고 멋있지 않습니까? 저는 세포 배양을 하기 전에 장갑을 끼고 에탄올을 뿌리면서 그 정도로 비장하지는 않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과 제 직업군의 전문적인 모습에 약간의 자아도취를 느끼기도 한답니다.

(좌) tvN 예능 '윤식당', (우) tvN 드라마 '유령을 잡아라' 중 한 장면

     식당에서 요리를 할 때도 장갑을 끼고, 범죄 현장에서 증거물을 수집할 때도 장갑을 끼고, 배선 작업을 할 때도 장갑을 끼는 것처럼,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장갑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너를 보호하기 위한' 이유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의료용/실험용 장갑의 수요가 증가해서 장갑 가격이 3배나 올랐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연구실 회의에서 하루 장갑 사용량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앞으로 장갑을 아껴서 써야 될 것 같지만, 이 글을 읽게 될 분들은 추운 겨울에 예쁜 장갑 번갈아 끼며 따뜻한 겨울 보내시길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매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