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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Mar 05. 2023

바지 내려

진짜 그럴줄은 몰랐다

수업이 끝났다는 종이 울리자마자 4학년 교실에서 땀 냄새를 풍기며 졸고 있던 아이들은 강으로 내달렸다. 헤엄을 치기에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친구들은 교문을 나와 신작로를 따라 달리다가 강으로 내려가는 샛길로 빠졌다. 경사가 급한 샛길 끝에 강이 펼쳐져 있었다. 강가에는 검은 바위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바위 위에 옷을 벗어 잘 개어놓았다.


우리는 수영복이 없었다. 남자아이들, 여자아이들 모두 팬티만 입고 헤엄을 쳤다. 자유형, 배영, 접영과 같은 수영 영법을 모르던 우리는 우리식대로 개헤엄, 개구리헤엄을 쳤다. 가끔 개헤엄은 어떻게 하는 거냐 묻는 사람이 있어 설명하자면, 개가 물속에서 수영하는 방법 그대로 물속에서 헤엄을 쳤다는 얘기다. 두 개의 손을 개처럼 구부려 땅을 파듯 물을 밀고 다리는 첨벙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헤엄법이다. ‘어떻게 그게 되지?’ 궁금하다면 수영장에서 해 보시라. 의외로 빠르게 헤엄칠 수 있다.     

 

나는 다리와 가슴에 물을 조심스레 끼얹었다. 그리고 발을 담그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낮의 태양이 강물을 덥혀 미지근했다.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자 그곳에 서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물이 내 몸을 받쳐주어 가벼웠다. 천천히 강 반대편까지 개헤엄을 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맞은편에서 강둑을 바라보니 우리 반 남자애들 세 명이 옷을 벗고 있었다.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애와 작은 애, 그리고 그즈음 내 관심을 받는 남자애였다. 곱슬머리에 손가락이 가느다란 그 애는 반에서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내심 그 애와 함께 헤엄을 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남자애들은 팬티만 입은 채 우리 쪽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뭔가 비밀스러운 작당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강 이쪽저쪽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몸이 추워서 달달 떨렸다. 잠시 물 밖으로 나와 뜨거운 햇볕 아래 몸을 말렸다. 햇볕도 더워서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강물 바닥엔 물처럼 투명한 송사리들이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강가 진흙이 있는 곳에 검은 말조개가 숨어 있었고 얕은 물 속 바위에는 다슬기가 기어 다녔다.      


우리는 다시 물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배가 철썩 물에 닿아 얼얼했지만 괜찮았다. 물속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며 움직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반 남자애 중 하나가 잠수해 다가오더니 내 팬티를 슬쩍 내리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너무 놀라 강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정확히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도 똑같은 일을 당했다. 우리는 남자애들을 향해 경고를 날렸다.

“너희들 그러다 죽는다.”     

그러나 남자애들은 우리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속에서 두 번 더 똑같은 장난을 쳤다. 화나고 창피해서 우리는 서둘러 물 밖으로 나왔다. 가끔 남자애들은 교실에서도 ‘아이스께끼’ 장난을 치곤 했다.

“너희들 두고 봐. 선생님께 다 이를 거야.” 

우리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히죽거리고 있는 남자애들한테 다시 경고를 날리고 씩씩거렸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나와 친구들은 담임선생님께 전날 물속에서 벌어졌던 남자애들의 만행을 낱낱이 고했다. 4학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3학년에 이어 2년째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보다 어린 아들과 딸이 있었고 학교와 가까운 사택에 살고 있었다. 한번은 반 친구들 모두 선생님 집에서 미국 LA에서 열렸던 올림픽 개막식을 본 적도 있었다. 우리 반 애들 모두 선생님을 좋아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숙제를 안 하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치면 무섭게 변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 반은 전교에서 숙제를 젤 열심히 하고 시험 성적도 제일 좋은 반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얘기를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어제 강에서 여자애들에게 못된 장난을 친 친구들 앞으로 나와.” 

선생님은 무섭게 교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고소함을 느끼며 세 명의 남자애들을 쳐다봤다. 그 애들은 서로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주저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재차 말씀하셨다. 

“누가 그랬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어서 앞으로 나와.”

잠시 뒤 나무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고 범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너희들, 교단 위에 나란히 서.”

거역할 수 없는 선생님의 노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 남자친구는 교단 위로 올라가 쭈뼛쭈뼛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나란히 섰다. 내 짝사랑 그 애도 가운데 끼어 있었다. 

“너희들, 어제 여자친구들에게 한 장난은 정말 끔찍한 짓이야. 너희들은 가볍게 생각했지만 당한 친구들은 장난이 아니라 평생 잊을 수 없는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거든.”

세 명은 교단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바지 내려.”

교단에 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반 아이들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저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서 바지 내리라니까.”

난 내 짝사랑 그 친구를 자세히 보았다. 바닥으로 얼굴을 떨구고 있어 곱슬머리 정수리가 보였다. 내가 그 애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 애는 내가 아닌 다른 친구에게 관심이 있었다. 내가 공부도 더 잘하고 예쁜데 왜 다른 애를 좋아할까 질투하며 그 친구의 모습을 따라 했다. 독특하게 걷는 친구의 걸음걸이가 좋아 보였고 나보다 높이가 낮은 그 애의 말투를 흉내 내기에 이르렀다. 가끔 내 짝사랑은 노란 고무줄을 손에 걸어 여자애들에게 새총을 쏘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 애가 날리던 그 고무줄이 내 이마를 따끔하게 때릴 때도 있었지만 아프기는커녕 기분이 좋았다.     


“어서. 바지 내려”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막대로 교탁을 내리쳤다. 세 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바지를 주섬주섬 내렸다. 

“팬티도 내려.” 

벌을 받는 아이들뿐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 모두 자신들이 들은 말이 틀렸나 싶어 선생님을 쳐다봤다.

“어서 팬티 내려.” 

교단에 선 세 명은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중력이 그 친구들의 얼굴을 당겨 아이들의 얼굴은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설마 그러겠어?’ 모두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과 세 명의 친구를 번갈아 보았다.

“어서 팬티 내리라니까.” 

선생님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윽고 세 남자애는 팬티를 내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들의 소리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교실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 고요했다. 아마 누군가 우리 반 복도를 지나갔다면 우리의 학구열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반 아이들 모두 그 어느 때 보다 또렷한 눈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앞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더위도 우리가 만들어낸 자장 안으로 감히 침범할 수 없었으며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응집되었다.    

  

“이제 들어가.” 선생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바지를 잽싸게 올리고 자리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 아이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너무 했다, 아니다로 편이 나뉘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엄청난 사건 이후로 여자애들은 안심하고 강에서 놀 수 있었다.      

나는 내 짝사랑이 끝나서 아쉬웠다. 그나마 그 친구가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데 그 앤 제 발로 차버렸다. 나쁜 놈. 

그 사건은 우리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졌고 우리의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는 계속 이어졌다. 세상을 달구던 그 여름 햇볕은 우리를 조금 더 크게 키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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