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떠오르는 옛남자
전화벨이 징징징 은밀하게 진동한다.
“여보세요? 김안나씨 인가요?”
중저음의 친밀감이 듬뿍 담긴 남자 목소리다. 그래. 남자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를 탄 것처럼 내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한 모금의 포도주가 내 속을 훑고 지나가며 남기는 여운 같다.
본능적으로 남편의 행방을 찾는다. 단지 남자 목소리 하나로 쓸데없이 눈치가 보인다. 남편은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부엌에서 서성이고 있다. 낚싯배 꼬리를 따라다니는 갈매기처럼 먹을 것을 수색하고 있다. 남편은 가스렌지 위의 빈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냉장고 문을 연다. 아무 소득 없이 에너지 낭비했다는 표정으로 냉장고 문을 닫는다. 싱크대 위에 놓인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듯한 손놀림으로 싱크대 서랍을 연다. 과도를 꺼내 무심히 사과를 자른다. 남편의 손에서 잘리는 사과도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지 뾰루퉁한 조각으로 접시에 담긴다. 사과 한 조각이 남편의 벌려진 입속으로 들어간다. 신경 안 써도 되겠다. 이미 나는 남편의 레이다 밖에 벗어나 있다.
“누구시죠?”
머릿속에 그 옛날의 남자들 얼굴이 하나씩 스친다. 이 목소리와 닮은 사람이 있었나?
설마 그 친구?
그 애도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이런 목소리를 갖고 있었지. 이십년 전, 고2 때 잠깐 소개팅에서 만난 이웃 남고에 다니던 친구. 그 시절 멋 좀 아는 애라면 입고 다녔던 잘 다려진 까만 기지 바지를 입었던 그 애. 쌍꺼풀이 진한 커다란 눈, 까무잡잡한 피부에 앞머리는 무스를 발라 뒤로 발라당 넘겨 나름 멋 좀 부렸었다. 그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그저 껄렁하게 노는 애처럼 보였다. 그런데 목소리는 외모와 달리 진실한 무언가가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퍼 올려지는 듯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의미 없는 말이 그 목소리를 통과하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말처럼 들렸다. 그저 그런 학교 얘기가 특별하게 들렸고, 함께 본 영화 ‘나이트메어’는 정말 끔찍하게 무서웠는데 그의 목소리를 거치자 잠은 잘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다섯 번 정도 만나다 서로가 원하던 이상형이 아니라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1년 후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여름, 그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내가 가끔 생각났다고 했다. 순수하고 범생이 같은 너라면 내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연락했다고 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 친구의 옷차림과 목소리는 확실히 떠오른다. 여전히 기지 바지를 입고 있었고 깊은 우물안에 있는 것처럼 울리던 그 목소리. 여전히 그 친구의 기지 바지가 싫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누구시죠?”
“아! 저는...”
남편의 입에 들어간 마지막 사과가 사각거리고 있다. 고개를 돌렸다. 내 목소리는 더 깊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고객님! 화성에 투자하기 좋은 땅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에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