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에 말할 수 있는 것들2
죽음이 정상 상태다
“아홉수라고 하니까 내 아홉수는 1월에 아버지를 보내드린 일 같다.”
지원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올해 1월 지원의 아버지는 칠십육년의 삶과 함께 떠나셨다. 일년전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치료하고 계셨다. 재희와 나는 문자를 받고 장례식장에 함께 갔었다.
“난 생명은 색이라고 생각해. 죽는 건 색을 잃는 거야.” 지원의 표정은 쓸쓸했다.
지원이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임종실로 옮겨졌고 엄마는 아버지의 모든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아버지 옆을 지켰다. 조용히 느릿느릿 아버지는 들숨 날숨을 이어갔다. 며칠 전 지원을 잡아줬던 아버지의 손은 가느다란 몸 옆에 힘없이 놓여 있었다. 벌어진 입술은 아주 옅은 진달래 빛이었고 가슴은 천천히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파르스름한 병원의 공기가 무거웠고 엄마의 마음은 더 파랗게 멍들어 갔다.
지원에게 죽음은 실체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르는 우연 같은 거였다. 여전히 아버지는 미약하나마 삶을 붙들고 계셨고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은 느닷없이 닥쳤다. 아버지의 마지막 숨이 입에서 뱉어지는 순간 입술의 붉은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생이 사라지고 죽음이 온몸을 덮었다. 지원은 너무 놀랐다. 죽음의 색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빨랐다. 그제야 지원은 살아있음이 여러 가지 색깔임을 알았다. 푸른 하늘, 붉은 나무, 분홍 입술, 갈색 눈동자처럼. 아버지는 죽음으로 색을 잃었다. 다양한 색들 속에서 아버지만 흑백으로 누워 계셨다. 창밖에 눈은 하얗게 흩날렸다.
말을 끝낸 지원은 휴지로 눈가를 훔쳤다. 우리는 각자의 삶과 죽음의 무게에 잠시 압도되었다. 재희는 지원의 등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책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하늘은 여러 가지 색으로 해가 잠기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지원의 말대로 세상은 색깔로 살아있었다.
“재희야, 너는 왜 사니?”
“응. 글쎄. 태어나서? 그러는 넌?” 나의 질문에 재희는 사실이지만 가장 싱거운 대답을 했다.
“그러게 왜 사는 걸까.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를 시작하면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언급했잖아. 살아간다는 게 그만큼 힘든 거야.” 나는 재희와 지원을 보며 동의를 구했다.
“맞아. 아버지를 보내면서 슬프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어. 암으로 고통스러웠던 아빠가 이제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그거 알아? 죽는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 상태라는 거. 어느 물리학자가 그러는데 죽음이 정상상태래. 온 우주를 둘러봐도 생명현상이 있는 곳은 지구가 유일한데 지구 내에서도 생명체보다는 무생물이 훨씬 많대. 그래서 죽음이 정상상태라는 거지.” 지원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우리가 특별하다는 말과 같네. 그래서 어떻게 살면 될까?” 나는 친구들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성실하게 살아야지.” 재희는 이 말을 하면서 웃었다.
“야! 그건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다.” 이제까지 재희의 이력을 알고 있는 지원은 나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숨쉬기에 특별한 목적을 부여하려니까 사는 게 어려운 거지. 미운 남편, 맘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그들대로 내버려 두고 너희는 자신을 위해 살아.”
가장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같은 재희가 말하니까 설득력이 있었다.
“사는 게 때에 맞게 해내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아. 결혼 전에는 딸과 학생, 회사원이라는 역할에 충실했고 결혼 후에는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이 추가되었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때는 정해져 있지 않아. 그때그때 그 역할들과 함께 내가 나를 위해 뭔가 하는 거지.” 나는 내 삶의 이력을 생각하며 말했다.
“요즘 난 줌바댄스 열심히 해. 일주일에 세 번 가는데 그 시간이 제일 즐거워. 가장 편안하고 가장 나인 것 같아.” 지원이 그녀 특유의 허스키목소리로 생기있게 말했다.
“그래 맞다. 의미고 나발이고 그냥 내가 좋은 거 하면서 욕심을 덜 부리면 되지.” 재희가 줌바댄스를 하듯 팔을 흔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