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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스포인트 Aug 05. 2022

퇴사한 나에게도 데스노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13년 이상 열심히 일한 나에게.

퇴직 선물로 뮤지컬 주간을 선물했다.


뮤지컬 주간 첫날.

내가 예매한 것은 뮤지컬 데스노트였다.


사실 나는 원작의 굉장한 팬이다.

일반판부터 애장판까지 모조리 사 모아 책장에 전시되어 있다.

애니메이션부터 일본 특유의 오글거리는 느낌의 영화까지 죄다 섭렵했을 정도로.


아직도 내 플레이 리스트에는

2015년 첫 공연이었던 데스노트 노래가 포함되어 거의 매일 듣는다.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질투한다.

‘어떻게 사람 머릿속에서 저런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닌 걸까.

  


살아생전 홍광호 배우님의 연기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인 강홍석 님도 뵙고 싶었고.


그런데.


“이상하다. 온 좌석이 새하얗게 빛나고. 내 앞에는 대기자가 넘치네~.”


놀랍게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데스노트는 첫 공연부터 마지막 티켓팅까지 죄다 실패했다.

나의 똥손은 생각보다 클릭을 빠르게 하지 못했다.


나 때는 말이야, 어?

보고 싶은 뮤지컬이 있으면 돈만 있으면 표를 구했다고.


근데 지금은 이게 뭐야?

돈과 시간이 있어도 VIP 표 구하는 게 어렵네?


이상했다.

분명 표가 풀리는 한 시간 전부터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 땡하는 정각에 클릭했는데.


왜 내 앞에 대기자가 이렇게 많은 거죠?

대체 표를 얻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냥 많이도 안 바란다.

1층 좌석. 그거 하나만 있으면 만족하는 내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 이번에도 관람하지 못하고 데스노트를 놓칠 거 같았다.


결국 4층 가장 앞줄 표라도 잡아야만 했다.

이 사진을 찍을 땐 몰랐다.

내가 무대를 보게 될 시야가 이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거란 것을.


누군가 말했다.

예술의 전당 4층은 돈 받으면서 봐야 하는 좌석이라고.


에이, 설마. 그때는 그리 가볍게 생각했지.

10배율 망원경을 챙기고,

저번보다 화려해진 무대 영상을 즐길 생각에 마냥 기뻤다.


유튜브로만 보고 듣던 홍광호 님의 전설적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참 좋은 삶이라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그 더운 날 힘겹게 찾아갔더니.

예술의 전당이 날 비웃었다.


‘좌석이 이게 뭐야?’


4층은 높은 경사 탓에 목숨을 건 스릴을 느끼며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이렇게 위험한데 무슨 안전 바는 이리 낮아?


내 무릎보다 낮은 나무 지지대는

조금만 삐끗했다간 그대로 추락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다른 뮤지컬들과는 다르게 여기선 커튼콜 촬영도 금지였다.


뮤지컬은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관극 문화가 이렇게 바뀐 거야?


결국 이 날은 배우님들 정수리만 보고, 노래를 듣다 나왔다.

이럴 거면 유튜브로 음악만 듣겠….

(아, 아닙니다. 할 말은 많지만, 안 해야지.)




다음번엔 날 위한 표가 있기를.

한 번쯤 상상해본다.


내가 만약 라이토라면.

데스노트가 내 눈앞에 떨어져 있다면 어떨까?


직장에서 날 괴롭혔던 놈들 이름을 확 써버려?

(그런데 퇴사하니 미운 감정도 조금 흐려졌다. 이제 다시 볼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신경 써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


나라면 데스노트를 주웠을 때, 분명 이럴 것 같다.

“아싸, 득템!”

이런 말을 외치며 내 장식장에 고이 보관해두겠지.

이게 바로 그 전설의 데스노트란다.

남들에게 자랑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덕후는 계를 못 타.

이번에 데스노트 피켓팅에 실패 아닌 실패를 한 것처럼.

죽었다 깨어나도 내 상상이 이뤄지는 일은 없겠지.


언젠가 나도 이런 기발한 스토리를 써 보고 싶다.

나도 노력형 천재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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