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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부 15화

시어머님의 삼 남매, 나의 삼 남매

by 채수아

♡ 내가 담근 마늘장아찌



아주 예쁘고 똑똑했던 시어머님은 부모님의 뜻으로 18세 나이에 세 살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처음 본 남편은 귀가 어두웠고 말이 어눌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옛 여인들이 그랬듯이 자기의 운명을 그냥 받아들였고, 심지어 막내며느리인데도 홀로 되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사셨다.


신체적으로 많이 부실했던 시아버님이셨지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가게 되셨고, 돌아와서는 또 군대, 또 군대, 이렇게 세 번이나 군대에 끌려가셨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셨다고 한다. 세 번째는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시체 비슷한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어느 정도 있던 재산은 시아버님을 살리는데 다 들어가고, 우리의 시댁은 그때부터 극빈 가정이 되고 말았다 모시던 시아버님은 7년 안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삼 남매의 미래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와 수원에 새 거처를 마련하셨다. 시어머님의 삶은 더욱 혹독해졌고, 삼 남매는 그 와중에도 똑똑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시어머님이 가끔 내게 자랑하셨던 것이 있는데,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우리 삼 남매가 부티가 난다'고 했고, 그 말이 늘 듣기 좋았고, 힘이 났다고 하셨다.


어머님의 삼 남매는 모두 공부를 잘했다. 가족을 위해 아주버님은 고등학교만 졸업을 한 후 일찍 직장을 구하셨고, 막내인 내 남편은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다. 두 아들은 같은 회사인 S 전자를 다녔고, 그곳에서 부장까지 근무를 했다 아주버님은 능력이 뛰어나 중국 업체의 스카우트를 받아 사장으로 7년간 근무를 하시다 퇴직을 하셨고, 남편은 공기업으로 옮겨 일하다 정년퇴임 후 지금은 국가기관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직업이 요리사인 남편의 누님은, 중학교만 나온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었는데, 나의 큰 딸이 대학을 입학하던 해에 야간대 입학을 했다. 중간에, 유치원 원감인 자기 딸이 아기를 낳아서 그 아기를 양육하다가 다시 복학을 하여 공부의 끈을 계속 이어나갔다. 50대 후반의 대학생이 장학금을 받을 정도이니, 이 집안 삼 남매의 열심한 근성은 때때로 나를 놀라게 했다.


시어머님은 살아오면서 늘 주변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자존심이 무척 강했던 어머니는 그 긴 세월을 이겨냈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셨다. 한 여인의 강철 같은 신념이 쓰러져가는 가정을 살렸고, 꼬물꼬물 했던 삼 남매는 어느새 중년을 살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어머님은 당신 소임을 마치시고, 몇 년 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앞날이 무섭도록 캄캄해서, 동네 호숫가에 잠시 서 있다가 물이 무서워 돌아오셨다는 어머니! 당신이 그날 물에 뛰어들지 않은 덕분에, 가족이 해체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착한 남편을 만나 삼 남매를 얻었다. 어머니의 강인함과 남편의 선함과 나의 감성을 고루 닮은 우리 삼 남매! 어머니는 아들, 딸, 아들 순으로 아이를 낳으셨고, 나는 딸, 아들, 딸 순으로 아이를 낳았다. 세 번째 아기를 낳았을 때 이백 점이라고 활짝 웃으셨던 어머님 모습이 떠오른다. 참으로 상처가 깊었던 한 가족을 만나, 나 또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여리고, 감성적이며, 세상 물정 모르고 하하 호호 웃던 아가씨가, 어느새 동치미를 닮은, 백김치를 닮은 여인이 되어가고 있다.


또 하루를 산다. 때로는 고민거리가 있어도, '오늘 하루만 잘 살자'는 내 매일의 다짐이 있기에, 난 씩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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