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어머님 기일이었다. 내가 아는 여성들 중에 가장 많은 고생을 하셨던 분이셨기에 같은 여자로서 짠한 마음이 깊었다. 아버님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셔서 충청도 고향 산에 묻히신 상태였고, 어머님은 6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평생 호적에만 부부로 되어있지, 몸도 마음도 떠난 두 분이었기에 돌아가셔도 그럴 줄 알았다. 아버님은 그저 어머님의 평생 짐이었고, 자존심 강한 어머님의 수치스러운 남편이었다. 어머님 삶의 이유였던 삼 남매조차도 아버님은 그런 존재로 보였다.
무심하지 못한 '나'라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시댁의 모습이었지만, 하나의 풍경처럼 시댁 식구들에게는 당연한 일로 보였다. 시집살이도 힘든 지경에 아버님을 함께 모시겠다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반대에 부딪히고, 시간이 그렇게 흐르다가, 아버님은 잘 마련된 우리의 큰 아파트에 입주하기 3개월 전에 한 많은 이곳의 생을 마감하셨다.
나의 초점은 늘 아버님이었기에 시댁 모든 사람을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라고 내심 생각했고, 시댁 눈치를 보다 아버님을 그렇게 홀로 세상을 떠나게 만든 것에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앞 일을 내다보셨던 것일까? 어머님은 당신의 말기 암 진단 바로 전에 있었던 '큰 아버님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길에, 우리 부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니들이 힘들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 이 근처로 모셔오고, 나 죽으면 같은 곳에 모셔라."
그 말씀이 있었기에 어머님 모실 장소를 충청도(아버님과 거리가 있는 납골당)로 정하시려는 아주버님의 뜻을 바꿀 수 있었다. 어머님을 먼저 근처 가족 납골묘로 모신 후, 시골에 계신 아버님을 함께 모셔왔다. 두 분이 함께하신 게 벌써 5년이 되었다. 막내인 내 남편이 두 살 때인가부터 떨어져 살았던(일주일에 한 번씩은 다녀오셨지만) 부부가, 돌아가신 후에 한 방에 계신 것이다.
난 늘 아버님 쪽으로만 기울여 생각했다. 군대 다녀온 후의 수전증과 청각장애로 가족을 건사하지 못한 못난(어머님 표현) 남편이었지만, 그렇게 버려두고 살았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모르는 부부만의 어떤 비밀이 있던 것은 아닐까? 군대에서의 충격으로 가끔 발작을 하실 때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 혹시 어머님을 몹시 괴롭히셨던 건 아닐까? 그래서 삼 남매만 데리고 도시로 도망치듯이 올라오신 건 아니었을까? 어머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없으니 사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님이 자주 하셨던 말씀이 가끔 생각나곤 한다.
"사람 싫으면 절대 못 산다."
어찌 되었든 한 많은 두 분의 이생의 삶은 끝이 났지만, 어머님의 마지막 내려놓으심으로 우리는 두 분을 함께 뵐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님의 해빙(解氷), 부부의 해빙(解氷)! 눈빛이 선량하셨던 나의 시아버님은 뭐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내 꿈에 나타나서 활짝 웃으셨던 것처럼 웃고 계실 거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