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맞선을 본 후 매일 만나다 프러포즈도 없이 몇 달 후 결혼을 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선을 보고, 그다음 해 2월에 결혼을 했으니 정말 초고속이었다. 수원시를 삼성시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주변에 삼성맨들이 많았다. 삼성 주변의 아파트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상가까지 번창하여 수원에 사는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회사를 특별하게 여긴 것 같다. 아주버님 또한 삼성맨이었고, 삼성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기자를 꿈꾸었던 내 남편은 그 길이 막히자 바로 형님이 근무하던 회사에 입사를 했다. 어렵게 자식을 키우신 어머님은 두 삼성맨으로 어깨가 늘 으쓱으쓱하셨고, 비록 가난했지만 선 자리가 끊임없이 들어올 정도로 두 아들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1989년 10월 1일 오후 세 시에 수원 남문에 있는 석산 관광호텔 1층 커피숍에서 우리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첫날부터 대화가 잘 통했던 우리는, 연애 시절에도 결혼 이후에도 대화를 많이 하며 살았다. 고된 시집살이와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어서 그나마 견디었을 것이다.
남편이 나의 특별한 제자들을 다 아는 것처럼 나 또한 이 사람의 특별한 직원들을 잘 안다. 엄마가 재혼하여 외삼촌에게 맡겨졌던 아이, 결혼해 맏며느리 역할하느라 마음고생이 컸던 제자, 미국에서 자주 보이스 톡을 하는 목사인 제자, 아직도 효자 노릇을 하는 여러 제자들. 남편은 교사는 아니지만 비슷한 역할을 하며 직장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마음 쓰는 사람들을 함께 걱정해 주며 살아왔다. 타 부서에서 남편 부서로 이동한 한 청년이 공황장애를 겪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잘 토닥여주라고 했고, 남편은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살피었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점점 안정이 되었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 남편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직장에서 사람 보살피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몸으로 실천했고, 그 과정에서 배우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런 사람이기에 평범하지 않았던 시댁 환경과 힘든 시집살이에서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크고 상처도 받았지만, 동지애 같은 걸 느끼고 살아온 것 같다.
또한 남편은 회사의 동료나 후배가 갑자기 직장을 잃었을 때 최선을 다해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자기소개서 쓰는 법, 면접을 보기 전에 준비할 사항 등을 꼼꼼히 체크해 주었다. 다행히도 몇 사람이 재취업에 성공해서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큰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난 종종 말해주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당신은 복 많이 받을 거야."
대기업에 이어서 공기업에서 정년퇴임을 한 남편은, 퇴임식 바로 다음날부터 국가기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이 사람의 일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나 또한 그걸 알기에 옆에서 응원하는 입장이지, 나하고만 놀자고 붙들지는 않을 생각이다.
스물여섯, 서른둘이 만나 뜨겁게 사랑하다 자연스레 결혼을 했다. 지금 내 나이 쉰아홉, 남편은 예순셋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하지만 서로가 애쓰고 살았다는 걸 마음으로 알기에 서로 보듬고 아껴주며, 우리의 남은 생을 물 흐르듯 살려한다. 아마도 잘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