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셋째 아이는 내가 육아휴직을 해서 직접 키웠지만, 첫째 아이는 시어머님이 키워주셨다. 워낙 지극정성 스타일이시라 나는 아이에 대한 걱정 없이 학교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2층 집의 아래층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도 할머니가 계셨다. 위층 주인 할머니와 아래층 전셋집의 할머니! 두 할머니는 드러나지 않게 묘한 심리전이 있었는데, 그것이 화산이 폭발하듯이 크게 터진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 문밖으로 조그마한 땅이 있었다. 시골출신이신 어머니는 땅을 그냥 놓아두지 못하는 분이셨고 정성스러운 분이시라, 그 땅에는 어머니께서 키우신 예쁜 싹들이 옹기종기 예쁘게 나와 있었다. 출근을 할 때마다 매일 마주치는 그 아이들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주인 할머니께서 그것이 샘나셨는지, 당신이 직접 그 땅에 먹거리를 키워보시겠다고 선포를 하신 것이다. 어머니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시는 어머니는 주인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계셨다. 퇴근길에 악담을 퍼부으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았다.
"남이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걸 엎어놓으면, 삼대가 천벌을 받는 겨."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끔찍했고, 그 동네 학교의 선생님이었던 내게 심한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순간, 나의 시어머니가 너무나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날의 어머니의 분노가 오랜 세월이 지나 떠오르니, 마음이 아파왔다. 어머님의 오랜 가난과 고된 삶이 마음을 파고들었나 보다. 비록 주인은 아니었지만, 놀고 있는 그 자그마한 땅의 돌들을 골라내고 또 골라내서 옥토를 만드셨던 어머니, 그 땅에 씨앗을 심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 설레셨을까? 그때는 몰랐다. 정말 몰랐는데, 이제서야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내가 나이가 드나 보다. 그 누구보다도 시어머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으로 이해가 되면서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우리 큰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학교에서 퇴근을 하고 와서 보니, 어머니도 아이도 집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 우리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것들을, 동네에 있는 '뉴코아'라는 백화점 앞 노상에서 팔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는 날씨도 꽤 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도 못 드리는 바보였다. 어머님 추운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내 아이가 남들에게 불쌍한 아이로 비쳐진 것이 너무나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더군다나 그곳은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 근처가 아닌가! 난 그 당시 시어머님을 자주 몹시 부끄러워했다. 가끔 동네 사람들과 다투시는 어머니, 몸이 피곤하여 이불도 못 개고 출근을 했던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내 방의 문은 열려있고, 동네 아줌마들은 우리 집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 이 많은 것들이 자존심이 강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참으로 힘들었던 것이다.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다. 돋보기 없으면 어머님처럼 바늘귀에 실을 못 꿰는 나이가 되었고, 자주 깜빡깜빡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밝은 색깔의 옷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용돈을 드릴 때는 봉투에 '사랑하는 어머니'라고 썼다. 통화 중에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곤 했다. 어머님 말기 암 투병 중이실 때는, 서로를 염려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우리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가슴 아팠던 나의 어머니!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