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일기 쓰기를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늘 밀린 일기를 쓰느라 바빴다. 누가 일기라는 걸 만들었을까, 원망을 하며 손목이 아프도록 일기를 썼던 기억.
결혼 후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나만 쓰고 나만 보는 일기를 매일 그렇게도 열심히 썼다. 시어머님의 괴롭힘에 당한 상처가 일기를 쓰며 조금이나마 아물어지는 걸 체험한 이후 생긴 습관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책을 무척 많이 읽던 사람이었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은 적도 한 번 없었다. 그림을 잘 그려 상을 받은 적은 있었어도. 교대에서 국어교육을 부전공했지만(그 당시 교대는 초등교육을 전공이라 했다), 졸업 후 문예부 선생님도 했지만, 난 글을 술술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 이후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일기를 쓰면서 내 글솜씨가 좋아지고 있었다. 일단은 글을 쓰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종류의 글 요청이 들어와도 잠시 생각에 잠겨 단어 몇 개를 적어놓고 나면 글이 술술 써졌다. 내가 봐도 신기했다. 학교 행사 글도 뚝딱, 교육청 잡지에 실릴 '교사 에세이'도 그냥 술술 흘러나왔다.
하여, 나는 글을 잘 쓰는 교사로 꼬리표가 달리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교육청 국어과 개선 위원이나 문예작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닮아 책을 좋아했고, 국어 점수가 높은 아이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마지막 학교인 용인 신갈초등학교는 포은문화제 글짓기 부문에서 최우수학교로 상을 받기도 했다. 수업 중 절대 인터폰을 하지 않으셨던 교감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인터폰을 하셨다.
"채 부장, 우리가 1등이래. 최우수가 두 명, 우수가 한 명, 종합 1위래. 정말 수고 많았어. 내가 쉬는 시간까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인터폰 했어."
내가 지도했던 아이들이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며칠 후 우리 학교 교문 위에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렸다.
시어머님은 내게 너무나 큰 산이었다. 감히 넘지 못할 큰 산이어서 늘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서 많이 아팠고 많이 울었다. 학교에 오래 머물리라 생각했던 내 교사 생활은 몸이 아파 40대 초반에 막을 내렸고, 시어머님과도 분가를 하게 되었다. 17년 동안의 고통보다 더 아픈 고통이 내게 찾아왔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평생 한 많으셨던, 자식과 손주들에 대한 집착이 많았던 시어머님께 '분가'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나는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선생님이 살아야 한다고, 자기가 처방해 준 약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과감하게 분가하고 약 잘 먹고, 건강을 회복하여 이젠 덜 아프고 멋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담당했던 여자 의사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난 그 이후 시어머님과 다른 공간에서 살게 된 것이다. 떨어져 살게 된 후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를 아껴주는 관계로 변화되었다. 오랜 지인 중 한 분이 sns에 올리는 내 글들을 몇 년 전부터 읽고 계셨는데,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니가 글 쓰는 사람이 되려고 그런 인생을 산 것 같아."
그럴까? 정말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