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Feb 22. 2023

실패한 가출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워 가출을 결심한 적이 있었다. 우리 친정 부모님께서 아시면 기절할 노릇이었겠지만.


퇴근 후, 학교에서 제일 친했던 선생님댁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고 과일까지 먹고 나서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선생님 꺼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셨다. 그 선생님은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이혼녀였는데, 아기도 없이 혼자 살고 계셨다. 꽤 지적이고 좋은 성품을 가진 분이셨는데, 매우 독선적인 남편과 몇 년을 살다가 일찍 결혼생활을 포기한 분이셨다.


"선생님, 저 오늘 집에 안 들어갈래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에요. 제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한 번은 보여주고 싶어요."


결혼 전의 내 발랄했던 모습과 소녀다운 감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던 선생님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빼빼 말라가며(41킬로)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매우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분이셨다.  9시가 되자 선생님은 내 가방을 들고 내 손을 잡고 무작정 나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택시를 태워 나를 집으로 보내며 말씀하셨다.


"채 선생, 나 다 알아. 내가 왜 몰라. 마음도 여리고 착한 사람이 오죽했으면 가출한다는 말을 내게 했겠어. 나도 오늘 우리 집에서 채 선생을 재우고 싶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 사건은 두고두고 채 선생 발목을 잡고 괴롭히게 될 거야. 그러니 그냥 집으로 들어가."


난 그 당시 그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많이 섭섭했지만, 그 선택이 얼마나 값있는 것이었는지 두고두고 깨닫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꼭 연락하게 되는, 지금은 멀리 하늘나라에 계시는 그 선생님 같은 분들이 내 인생에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던 인연들! 그 덕에 힘듦 속에서도 큰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다. 마침내는 시어머님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상처들은 기적처럼 다 녹아내렸다.



사진 : 네이버 이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