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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Nov 26. 2022

나는 가끔 무식해서 용감했다

사진 : pixabay


우리 옛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소심하고 얌전하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며 자란 나에게, 그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 안에 그런 기질이 숨어있다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남들이 두려워하는 '시집살이'를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일이고, 고생 많으셨던 한 어르신을 모시는 당연한 일이고, 나 자체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특히 나는 아이들과 어르신들과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사람으로, 그동안 누구나와 잘 지내지 않았던가!


여동생은 내게 '잔다르크'라고 했다. 여리디 여린 언니가, 그런 힘든 시집살이를 하며 시댁 형제들까지, 조카들까지, 더 나아가 시댁에 연결된 인연들까지 그렇게 챙기며 사는 모습이 전투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도 몰랐다. 그저 아이들 사랑하는 초등 교사였던 나에게 어떻게 그런 엄청난 에너지가 있었는지. 아마도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나름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 이후 다 피하고 싶어 하는 학교 대표 연구수업도 내가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고, 약하디 약한 교사를 괴롭히는 교감선생님 앞에 서서 '일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시라'라는 조언까지도 했다. 왜냐하면 그 교사는 출산 후 산휴 중인 사람이었고, 그 당시 하혈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사가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해야 할 엄청난 일을 미리 정해놓고, 그 교사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내가 만난 관리자 중 인성 최악의 교감이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분이셨고, 찍히면 괴롭힘을 당하는 그 교감에게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는 알았으나, 그 앞에 서겠다는 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무식한 나는 그때 또 용감하게 나서고 말았다. 교감선생님은 내게, '이웃 학교 교감 딸인 네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하셨고, 나는 교감선생님께 '우리 아버지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렸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손해 날 만한 짓을 가끔, 그렇게 쉽게 할 때가 있었다. 사람의 도리랄까? 힘없는 누군가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는 신념이었을까? 비겁하게 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가끔, 무식해서 용감했다.

시댁은 나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시어머님의 거친 말투와 부정적 기운, 자식과 함께 살고 싶어 하시는 절절한 마음, 아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싶은 아주버님의 내게 향한 미안함, 최선을 다하되 어머님만큼은 모실 엄두를 못 내는 형님, 힘든 자기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전화로 자주 털어놓던,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던 이혼한 시누님까지. 시댁에서 내가 가장 키가 작고 내가 가장 나이가 어린데, 내가 마치 그들 모두를 품고 사는 엄마 같았다.


도리뫄 책임감에 짓눌려 나는 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서서히 망가져갔다. 마음도 황폐해졌다. 어쩌면 매일 만나는 나의 학생들이 나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한다는 남편도 내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를 바랐다. 상처 깊은 시댁의 따스한 온기가 되고 싶었던 내가, 어느새 가장 상처 깊은 사람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시댁 식구들은 건강했고 행복해 보였다. 어머님이 말기 암으로 돌아가시기 이전에 어머님은 장염으로 딱 한 번 입원을 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원이 뭔지도 모르게 몇십 년을 사는 동안, 나는 거의 해마다 입원을 할 정도로 아프고 살았다. 학교에서는 '가장 몸 약한 교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건강은 당연하고, 결혼 전 결석이나 결근 없이 살던 나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현실이 너무나 비참했다. 서러웠고 억울했다.


어느 날 친구 모임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우리 형님처럼 살 걸 그랬나 봐.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말하고 살 걸. 책임감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시비분별을 속으로 많이 했었는데, 결론은 이래. 형님은 늘 건강했고, 난 늘 아팠어. 왜 우리 아버지는 날 그렇게 키우셨을까? 좀 손해 보고 살아라. 사람답게 살아라. 비겁하지 마라. 그런 말들이 내 세포 속에 각인되어서 나도 모르게 그게 옳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살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신혼 초에 내게 왜 시집살이를 받아들였냐고,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고 말했던, 결혼을 먼저 했던 친구가 나를 보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병원생활도 많이 했었고, 교사 아닌 나를 상상도 못 했던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일찍 떠났다. 어느새 나의 삼 남매는 성인이 되었고, 나는 내 살아온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내는 글쟁이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 그래도 지혜가 뭔지, 자기 사랑이 왜 소중한지를 깨달았으니, 예전보다는 잘 살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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