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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Dec 19. 2022

참 힘들었던 시집살이

사진 : 고 장욱진 화백의 도록에서 찰칵






결혼 시작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잘 모시고 살 자신이 있었다. 측은지심이 지나치게 많았고, 수녀가 되어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내게, 한 많은 시어머님의 삶과 상처 깊은 시댁은 오히려 사명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머님이 좋았다. 외모가 시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잘 모시고 살 줄 알았다. 결혼한 지 세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시댁 식구들 모두, 지금은 '에버랜드'지만, 그 당시엔 '자연농원'이라 불렀던 곳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나는 결혼 전에도 부모님께 순종적이었고, 결혼 이후에도 시어머님께 순종적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안 가겠다고 했다. 나는 임신 중이어서, 주말에 몸을 쉬어주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모두 어머님이 계신 우리 집으로 모였다. 떠나는 가족 모두를 배웅하는데, 훗날 고모(시누님)와 이혼한 고모부가 제일 늦게 집을  나가면서 내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어른 모시기 많이 힘드시죠? 많이 힘드시겠지만, 잘 이겨내세요."


나는 웃으면서 힘들지 않다고, 어머님이 잘해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모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퇴근한 나를 붙잡고, 어머님은 늘 내게 세뇌교육을 시키셨다.


"에미야, 니가 나를 평생 모시고 살아야 혀. 니 형(형님)은 나를 안 모신단다."


그러시면 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렸다.


"어머니,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제가 어머니 평생 모시고 살 거예요."


그랬다. 그건 내 100% 진심이었다. 남편과 연애 중에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장애가 있으셨던 아버님 대신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셨는지, 그리고 따로 살면서도 어머님의 괴롭힘이 힘들어 시동생인 자신을 불러, 어머님을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고 형수가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을.


난 내 마음 그릇이 바다인 줄 알았다. 시댁 식구 모두를 품고도 남을 줄 알았다  어머님이 가여웠고,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살아온 아주버님의 무게감이 가여웠고, 시어머님을 무서워하던 형님이 가여웠다. 그리고 자라면서 딸이라고 차별받으며 서러웠던 고모(시누님)가 가여웠다. 늘 정성으로 그분들을 대하고 싶었고. 내 마음처럼 눈빛도, 말도, 행동도 그랬을 거라 지금도 믿고 있다.


자꾸 알아갔다, 왜 형님이 어머님을 죽어도 못 모신다고 했는지. 퇴근하면 내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발길이 무거워졌다. 큰딸이 아기였을 때, 나는 그 전날 나를 괴롭힌 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동네를 빙빙 돌며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이 있는 집이니,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주 화가 차올랐다. 어머님의 습관적인 잔소리와 차가운 말투가 싫었고, 습관적인 거짓말이 너무도 싫었다. 그리고 내 안에 미움이 있다는 현실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 마음을 매일 일기에 풀어냈다. 쓰다가 한숨을 짓고, 쓰다가 눈물을 쏟았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스트레스를 술로 풀던 이상한 직장 분위기에 횝싸여, 일주일이면 서너 번 정도 집에 늦게 들어왔다. 그랬으니 밤마다 일기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살 줄 상상도 못 했었다. 마음이 괴로우니 몸이 점점 말라가고, 나는 자주 아픈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 3년 차, 내 마음의 고통이 너무나 커서 형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풀고 또 풀으며, 어머님의 한 많은 삶을 떠올리며, 용서하고 또 용서하면서 어머님의 좋은 며느리가 되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 힘듦이 뭔지 너무나 잘 아는 동서지간이니, 난 형님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형님, 도와주세요. 제가 마음이 지옥이에요. 방학 한 달 동안만 어머님을 모셔주세요. 제가 더 기도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을게요."


전화로 내 말을 들은 형님은 단호했다.


"동서, 난 못 모셔.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난 불편해서 못 살아. 매일 다니는 수영장도 못 갈 거야. 그리고 어머님이 집에 오시면 남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난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있었어도 아버님의 시골 요양생활로, 남편이 없는 사람처럼 사신 어머니셨기에, 아주버님도 내 남편처럼 조심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 전에는 절대 방문을 닫지 않는 게 내 남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렇게 난 홀로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남편과는 대화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고, 내 마음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면 남편은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은 좋은 환경에서 자란 착한 사람이잖아. 당신은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엄마는 살아오시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하신 분이야. 나도 자라면서 엄마의 잔소리와 사나운 말투가 너무 싫었어. 하지만 참았어. 엄마가 불쌍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엄마를 이해해 줘."


그 말이 일회용 대일밴드 역할을 했지만, 나는 서서히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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