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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Dec 20. 2022

내 딸이 어머님의 딸이 되었다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입덧이 심해 잘 먹지도 못했지만, 조그만 그 아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행복했다. 학생들을 예뻐하던 나를 보면서 학생 어머니들이 내게 자주 했던 말은, 선생님을 엄마로 부를 아이는 정말 좋겠다는 거였다. 자기보다도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고, 생글 웃으며 등교하는 아이 모습에 자기의 하루도 행복해졌다는 분도 계셨다. 내 친정엄마는 자식도 안 낳아 본 아이가 학생들 이뻐하는 게 정말 신기하다고도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과하다 여길 정도로, 난 학생들을 좋아했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어떤 아이가 나를 '엄마'라고 부를 거라는 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학교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다가 내가 종소리를 듣고도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자, 나를 찾아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던 일이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계속 구토 중이었는데, 방송이 들려왔다.


"2학년 3반 어린이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가세요."


그 소리에 놀라 내 입덧 구토가 멈추었고, 나는 교실로 달려갔다. 학년 막내 교사라고 '연구 수업'이 배당되어, 그걸 준비하고 수업을 하느라 고생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수업하던 때가 아니어서, 국어과 수업에 필요한 그림 몇 장을 전 해에 가르쳤던 제자가, 나 대신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연구수업도 했고, 학교 운동회 때 만삭의 몸으로,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든 원 안에서 손을 반짝거리며 무용도 했었다. 아마도 학교 운동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또 주번 교사가 되었을 때, 만삭의 몸으로 교통지도를 했던 일도 떠오른다. 교통 신호등에 맞추어 깃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을, 운전석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갔다. 그날 오후에 다른 학교에 근무하던 친구가, 걱정이 되어 수업이 끝난 후 내게 전화를 했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학교로 온 전화를 교실에 있는 인터폰으로 이어받았다. 그런 힘듦 속에서도 나는, 퇴근 후에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일기장에 편지를 쓰곤 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땅땅하게 니가 뭉쳐있으니까 걱정이 많이 되었어. 미안해. 이젠 편히 쉬렴."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난 엄마가 되었다. 아기가 숨을 안 쉰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오랜 진통 후 급히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서 남편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 너를 닮은 예쁜 여자 아기야."


병원에서 8일을 입원했다가 우리 집으로 퇴원을  했다. 원래 내 계획은 친정으로 가는 거였는데, 배가 불러오자 어머님은 미역을 사다 놓으셨고, 산후조리를 당신이 해주신다고 했다. 난 차마 친정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산후조리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밤에 자지 않는 아기를 안고 날밤을 샜다. 그때까지도 수술한 배의 상처에 통증이 있었는데 말이다. 어머님은 '아기가 백일 때까지 엄마가 끼고 자야 평생 아기가 건강하게 산다'고 하시며, 밤에는 절대 아기를 돌봐주시지 않았다. 산후조리의 중요성을 몰라 자고 있는 남편도 깨우지 않고 꼬박 밤을 새웠다. 아기를 보러 어머님 친구분들이 집에 놀러 오시면 어머님은 그러셨다.


 "울 애기가 얼마나 신통한지 밤에 울지도 않고 잘 자. 뱃속에서부터 엄마 속 안 썩이던 지 애비를 닮았나 벼."


안고 있다가 누이면 우는 아기를 밤새 안고 있었는데,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두 달이 지났다. 시어머님 모시고 사는 집이 어려워 전화만 하시던 친정엄마가, '이러다가 나 죽을 것 같다'는 내 말에 급히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머니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어머님께 고생 많으셨으니 이제 친정으로 데려가서 당신이 보살피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님은 그러시라고 했고, 나와 아기는 엄마를 따라 결혼 전, 내가 살던 집으로 갔다. 햇살이 잘 드는 34평 아파트가 대궐처럼 느껴졌다. 우리 집은 2층에 사는 주인집을 위해 계단을 화려하게 지은 구조여서, 거실이 어두운 작은 집이었다.


친정에 가자마자 엄마는 나를 내 방 침대에 누이고 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기는 엄마가 데리고 주무셨다. 다음날 젖 말리는 약을 내게 먹이고, 밤에 푹 자라고 하셨다. 친정에 있던 한 달 동안 엄마는 4킬로 정도가 빠지셨고, 나는 컨디션은 좀 나아졌지만, 잠을 못 자서 41킬로로 비쩍 말랐던 몸은 그대로였다. 친정에 아기를 보러 오신 시어머님은 젖 대신 우유를 먹는 아기를 보고, 말씀은 못하시고 불편한 얼굴을 하셨고, 그걸 본 내 마음이 또 불편해졌다.


친정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와 백일잔치를 집에서 했었는데, 그 며칠 후부터 아기는 밤에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님이 아기를 데리고 주무셨고, 그 이후 아기는 어머님의 딸이 되어, 당신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아기를 우리 방에서 못 자게 하셨다. 엄마랑 자고 싶다고 가끔 떼를 써도 어머니는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주말에만 시골에 계신 시아버님께 다녀오셨기 때문에, 그때만 온전히 내 딸이 되었다.


내 딸에 대한 어머님의 사랑과 집착은 대단하셨다. 나는 거기에 맞설 힘이 없었다. 시집살이 자체도 힘들고, 몸이 안 좋은 상태여서 난 어쩌면 마음으로 포기했던 것 같다. 어머님 자랑은 늘 그거였다.


"글쎄, 우리 애기는 지 엄마보다 날 더 좋아한다니께. 지 엄마 학교 가도 찾는 법이 없어."


어머님의 그 말이 내게는 상처가 되었지만, 난 애써 외면했다. 출근길에 가끔 나를 따라간다고 운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없을 때 찾지 않는다니 다행이라 여긴 것 같기도 다. 세월이 많이 흘러 고모(시누님)가 할머니가 되어 딸의 아기를 돌볼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지 엄마 출근하고 나면, 잘 놀다가도 엄마를 찾아. 할머니가 아무리 잘해줘도 엄마가 최고지. 옛날에 지혜(우리 큰딸)도 그랬다잖아. 유치원에 가기 전인데도, 시계를 볼 줄 알았는지 엄마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현관에 앉아있더래"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게는 말씀 안 하셨는데, 당신 딸에게는 하신 거였다. 난 우리 딸이 현관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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