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물건을 사러 다이소에 갔다. 요즘은 김치를 자주 담그니 소쿠리 하나가 더 필요해서 소쿠리 코너로 가니, 파란색과 형광빛을 띤 분홍색, 두 가지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님 생각이 나서 분홍으로 골랐다.
둘째와 셋째 아이는 육아휴직을 해서 거의 내가 전담으로 키웠지만, 첫째 딸은 어머님 위주로 양육을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 딸은 늘 형광색 옷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종류의 색깔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연두색도 그냥 연두가 아닌, 야한 형광빛을 띠었고, 주황도, 분홍도, 모두 요상한 느낌을 주었다.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유명 브랜드의 옷들이 있었지만, 어머님은 당신이 시장에서 사 온 그 옷들만 입히셨다. 그렇다고 퇴근해서 옷을 갈아입힐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냥 받아들이고 살았고, 어머님이 주말에는 아버님이 계신 시골에 다녀오시기 때문에, 주말에만 내 취향대로 아이 옷을 입혔다.
딸이 네 살 정도 나이였을 때었는데, 퇴근해 집에 오니,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시누님의 아들이 있었다. 형광색 옷을 입은 딸의 머리가 남자아이처럼 상고머리가 되어 있는 걸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조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화를 냈다. 여자아이 머리를 저렇게 남자애처럼 자르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남자 동생 보려면 이래야 한다고 당당히 말씀하셨다. 결혼 이후 힘든 마음이 몸으로 나타나 비쩍 마르고 자주 아픈 며느리에게, 겉으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속내를 그리 표현하신 거였다.
시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집이 휴식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점, 집에서도 옷을 편하게 입지 못한다는 점, 주방에서의 의견 차이(나는 고수인 어머님을 따르는 편이었지만, 어머님 잔소리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이런 몇 가지가 주된 불편함일 것이다. 더 보태어 아이 양육 문제도 스트레스를 충분히 받을 소지가 있는데, 우리 어머님은 당신 앞에서 절대 아이를 야단치지 못하게 하셨다.
큰딸은 어렸을 때부터 신통하고 기특한 면이 많아서, 어머님의 자존심을 한껏 올려주었다. 한글도 '한글나라' 코스 없이 깨우쳐 우리를 놀라게 했는데, 알고 보니 아이가 할머니랑 길을 걸어가다가 간판을 보면 글자를 물었고, 새우깡을 먹으면서도 글자를 물었던 것이다. 무학이신 어머님은 그게 너무나 신기해서 무척이나 열심히 대답을 해주셨을 것이다. 또한 나이 들수록 어머님의 양육방식이 옳았다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가장 잊혀지지 않는 어머님 말씀은 이것이었다.
"우리 지혜는 훌륭하게 태어난 아기니께, 그냥 이뻐만 하면 되는 겨. 뭐라 할 거리가 있냐? 난 시상(세상) 태어나서 이런 애를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이런 애를 낳았냐?"
시집살이로 마음이 힘든 나에게, 어떻게 이런 아이를 낳았냐는 말씀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그 아이는, 총명하고 지혜롭게 잘 성장했다. 어머님이 사랑하셨듯이 아이도 할머니를 극진히 사랑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몇 달을 눈물바람으로 살 때도, 큰딸의 아픔이 떠올라 가슴이 저미는 듯했다.
어머님이 내 딸에게 입히는, 촌스러워 보이는 형광색을 정말 싫어했는데, 내가 형광색 바구니를 고르며 미소 짓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이리라. 김치를 담글 때마다 천 원짜리 이 바구니를 사용한다.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김치 맛도 더 좋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맛있는 김치를 식구들이 먹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미소 지으실 것 같다.
"어머니! 막내며느리, 잘하고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