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다녀온 첫날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던 우리 부부는, 둘이서만 사는 다른 신혼부부와 달리 늘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어머님 불편하실까, 해서 매사에 어머님을 의식하며 살았다. 어머님과 셋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방에 둘이서만 있는 시간에도 항상 문을 조금 열어두고 있었다. 그건 내 남편이 시작한 일이었고, 나 또한 습관적으로 그랬다. 잠을 자는 시간에만 우리 방문을 닫았다.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건 생각보다 꽤 힘들고,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신 어머님의 경우에는 더욱 신경 쓸 부분이 많아진다.
결혼 전에는 TV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았던 나였지만, TV 드라마를 너무나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프로그램 시간을 다 외워 틀어드리고, 옆에 앉아 수다를 떨며 어머님과 드라마를 보곤 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난 첫아기도 자연스럽게 '태순이'가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걱정이 된 적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의 TV 사랑은 변함없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큰 아이가 네 살 때쯤인가, 옆반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나와 비슷한 상황으로 고부간의 갈등이 심했고, 아이 교육상 좋지 않아 걱정이 되어 어머님께 말씀드렸지만, 고쳐지지는 않고 자꾸 다툼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그 이유로 얼마 되지 않아 분가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 태순이였던 큰딸은 감사하게도 공부를 매우 잘하는 아이로 자랐고, 할머니와 친밀도가 가장 높은 아이로 성장했다. 어머님 병환 중에도 매주 주말에 서울에서 내려올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어머니를 아는 모든 사람은 우리 큰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름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많을 것들을 알고 있었다. 아이가 수시로 이름 있는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 장학금을 받고 있다는 것, 알바로 번 돈의 일부를 당신께 드렸다는 것, 해외 인턴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 이어 취직을 했다는 것, 딸이 할머니께 사드린 많은 선물 이야기까지... 이 생에서 어머님이 가장 많은 사랑을 주었던 나의 큰딸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내게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에미야, 그런 아기를 아무나 낳냐? 난 니가 그 아이 낳아준 것만 해도 너무 고맙다."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던 17년 동안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어머님의 주특기였던 '험담'이었다. 나와 대화를 할 때도 늘 누군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곤 했는데, 같이 사는 며느리인 나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밥'이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에게(학구에 살고 있을 때는 정말 고역이었다) 친척들에게 하신 이런저런 험담들이 고스란히 내 귀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사실도 있었고, 사실이 부풀려진 것도 있었고, 거짓도 있었다. 가장 속상했던 것이 내 아이들까지 내 험담을 자주 하시는 거였다. 그래도 존경받는 엄마로 살고 싶었던 내게, 어머니는 내게 큰 수치심을 안겨주셨다. 또한 한 번도 같이 살지 않았던 큰며느리, 내 남편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던 큰며느리 집에 가서 내 험담을 하신다는 사실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형님은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자기는 어머님 말씀을 들어드리고, '어머님의 험담을 화를 내며 막는다는 아주버님의 행동'을 강조하시기만 했다.
어느 집이나 모시는 며느리가 가장 힘들겠지만, 맏이가 아닌 사람이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함께 살며 많은 걸 공유하고 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뒤늦게 아는 '왕따'가 되는 기분을 종종 느꼈다. 더군다나 충청도 분이셨던 어머님은 '맏이를 세워주어야 집안이 바로 선다'는 신념이 늘 있으셔서, 밖에 나가 거짓말까지 하시며 맏이가 칭찬받을 일을 만들기까지 하셨다. 내가 도인의 경지였으면 허허, 웃으며 넘겼겠지만, 어머님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가슴을 후벼 파는 독설과 거짓말들이 많은 것들과 함께 내 가슴 안에 '화'를 키우고 있었다. 그 화가 나를 서서히 병들게 했고, 분가 후에 어머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내 화가 녹아내렸으니 백 번 천 번 감사할 일이다.
한 친구는 처음부터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심적 고통이 너무 심하자, 몇 년 안에 남편이 서둘러 분가를 강행했다. 분가를 한 이후에도 미국에서 사시는. 맏이 대신 맏이 역할을 충실히 하며 30년을 살아왔다. 시아버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남아계신 시어머님은 내 친구를 의지하며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그러다가 맏이 부부가 갑자기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왔다. 명절을 함께 두 번 보냈는데, 맏이 역할을 하시겠다고 하는 형님으로 인해 음식 준비도 엉망으로 꼬이고 말았다고 한다. 친구가 차라리 외며느리, 맏며느리가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을 때 나 또한 솔직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복작복작한 고부의 시절은 가고, 모양새가 많이 바뀌고 있는 세상이다. 친구들 모두 만만치 않게 며느리 노릇을 하며 살았지만, 새로 맞이한 며느리가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하니 듣는 내가 흐뭇했다. 사실 한 남자로 인해 고부로 만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가. 마음을 잘 쓰고 살면 그냥저냥 잘 흘러가는 게 세상살이일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