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살면서 많이 하던 생각이었다 남편과 사귀다가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 집은 어머님과 남편이 사는 집이 아니라 형님 가족이 사는 30평대 아파트였다. 시댁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던 그날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시던 어머님은 러닝셔츠 차림이었고, 나는 벽돌색 정장 차림이었다. 긴장하여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닦았던 기억이 있고, 밥을 맛있게 먹으려고 애썼던 기억도 있다.
그 이후에 어머님과 내 남편, 둘이 살던 집에 몇 번 갔었다. 그 집은 내가 결혼 후 들어가 살 집이었는데, 아주 작은 전셋집이어서 엄마가 사주신 침대를 취소시킬 정도였다. 어머니는 평생을 전세로 사신 것을 큰 한으로 안고 사신 분이셨다. 어머님은 또 하나의 한이 있었다. 당신의 큰며느리가 대놓고 어머님을 안 모신다고 막내아들에게 말한 걸 알고, 꽤 많이 속상하셨는지 결혼 후 일 년 동안, 내가 퇴근을 하면 앉혀놓고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곤 하셨다.
"에미야, 글쎄 니 형이(형님을 지칭하는 말) 나를 안 모신단다. 그러니 니가 나를 평생 모시고 살아야 혀"
나는 어머님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평생 어머님을 모시고 살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렇게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머님의 아군은 내가 아니라, 형님으로 바뀌었다. 형님이 싫어하던 어머님의 많은 행동들이(거짓말과 험담과 막말 등) 그대로, 아니 더 심하게 나타나면서 나도 어머님이 미워질 때가 종종 생겼다.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살림도 못하고 덜렁거리는 내가 눈에 차지 않으시니, 형님네 쪼르르 달려가서 내 험담을 하고 돌아오시곤 했다. 그걸 형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동서, 글쎄 내 남편은 세상에서 동서에게 제일 잘하는 사람이야. 내게도 애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냉정한 면이 있는 사람이 동서에게만은 그렇게 잘한다. 어머님이 집에 오셔서 동서 흉을 보면, 시끄럽다고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
나는 형님이 그 말을 내게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주버님 칭찬을 하려는 것 같지만, 어머님의 험담과 거기에 동조하는 형님의 태도가 나를 몹시 속상하게 했다.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면서도 난 왜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을까? 내 앞에서 말을 전하지 말라고 당차게 말했어야 했는데...
어머님을 모시던 17년 내내 그런 분위기로 흘러갔기 때문에 나는 자주 억울하고 화가 났다. 특히 어머님에 대해서. 어머님의 습관적인 거짓말과 막말과 형님과의 묘한 삼각관계는 내 평화를 자주 깼고, 나는 속으로 피멍이 드는 화병 환자 비슷한 사람으로 변했다. 결혼 이후 열 번이 넘게 입원을 할 정도로 몸이 많이 아팠고, 결혼 17년이 되었을 때는 아예 수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그래서 나는 1년 병 휴직을 하고 이어서 사직서를 쓰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어머님과는 의사의 권유로 분가를 했다. 내 몸은 아주 조금씩 회복되었고, 어머님과는 분가 이후 좋은 관계로 지내게 되었다. 그건 내 노력보다는 어머님이 180도로 바뀌신 덕분이었다. 어머님은 그동안 내게 하지 않으셨던 '고맙다'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다. 안부 전화 한 통에도, 돈을 드릴 때도, 맛있는 음식을 사드릴 때도.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았다.
남편 복이 없어 평생을 홀로 삼 남매를 키우신 어머님은, 그래서 자식과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셨다. 그 역할을 막내인 내 남편이 하려고 마음먹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바로 오케이를 했기에 우리 세 사람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마음고생이 너무나 컸던 시집살이를 하면서, 친정과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바둥바둥 살아가면서, 나는 종종 이 생각에 빠지곤 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랬던 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 사랑이신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나는 어머님이 그리워 자주 하늘을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