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아버님 계신 충청도 웅천을 다녀오시던 어머님, 아마 아기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부만 집에 있는 주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 꿈이 있었어. 그런데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나는 궁금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남편을 졸랐다.
"3층 집을 지어서 큰 아들네랑 작은 아들네랑 같이 살고 싶다고, 우리 어릴 때부터 자주 하셨던 말씀이야. 그런데 나 결혼 전에 형수 앞에서 그 말씀을 하셨다가 형수가 기겁하는 걸 보시고는 꿈을 접으셨겠지."
그때까지는 어머님이 내게 언행을 조심하셨던 때라,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말했다.
"어머나! 대가족으로 사는 거네? 재미있겠다. 난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남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님은 9남매의 막내며느리셨다. 첫째 시어머님은 자식 여섯을 낳고 키우다 돌아가셨고, 둘째 시어머님이 시집와 삼 남매를 낳으셨는데, 우리 아버님이 막내아들이셨던 것이다. 열여덟 살에 팔려가듯이 결혼을 한 어머니는 홀시아버님을 7년간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제법 큰 집에서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았고, 아주버님네도 함께 사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나이가 어렸지만, 손끝이 야물어서 시아버님 밥상을 늘 마음에 들게 차리셔서 시아버님 이쁨을 받으셨고, 시아버님은 그 보답으로 동네 마실 갔다가 얻어온 귀한 먹을거리를 뚜껑 닫은 밥그릇 안에 넣어주곤 하셨다고 한다. 그걸 어찌 알고, 동서 형님이 시간 맞춰 찾아와 시샘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하셨다.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동서 시집살이가 더 무섭다는 말을 하신 걸로 봐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병든 시아버님 대소변까지 받아낸 며느리였지만, 시아버님 돌아가신 후 막내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동네 아주 작은 집으로 쫓겨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삼 남매가 시골에서 자라 어떻게 성장할지 뻔한 일이라 판단한 어머님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시고는 자식들만 데리고 수원에 둥지를 트셨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시골에 내려가 논과 밭을 살피시고, 아버님 먹을거리를 챙겨놓고 사신 게, 몇십 년 세월이었다. 청각장애와 수전증이 있던 아버님은 시골에서 요양생활 비슷하게 하며 사신 거였고, 어머님은 수원 매교동의 단칸방에서 죽기 살기로 자식 공부를 시키신 거였다.
어머님의 3층 집에 싫어하시던 아버님 방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자식만 바라보고 사신, 특히 아들과 딸을 눈에 띄게 차별하며 키우신 분이셨기에, 오로지 두 아들네 가족하고만 그 집에서 살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의 꿈은 큰며느리를 얻으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고, 막내아들을 결혼시키면서는 반쪽짜리 꿈을 꾸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17년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 세월에는 많은 아픔과 눈물과 한숨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질 수는 없지만, 어머님의 영혼을 느낀다.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애틋함으로 막내아들 가족과 딸의 가족이 어머님을 뵈러 납골묘를 다니며 생각했다. 그 3층 집에는 큰아들 가족이 빠지고, 어머님을 모시고 남매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머님 꿈을 이루어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이해하시죠? 어머님 돌아가시고 난 후, 삼 남매가 하나 되지 못해 무척 죄송해요. 하지만 방법이 아직 없네요. 어머님이 가장 많이 챙겨주고 받들어주었던 맏이 부부였건만, 어머님을 너무 빨리 잊은 건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동생들에게 등을 돌리고 잠수를 타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삼 남매 사이좋게 지내라고 유언을 남기셨건만... 어찌 되었든 어머님은 천국에서 편히 계셔야 해요. 이 세상에서 고생을 넘치게 많이 하셨으니 꼭 그러셔야 해요. 꼭이요!"
사진 : 유진 게스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