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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부 11화

나의 시아버님

by 채수아

결혼 전 설 명절에 아버님을 처음 뵈었다. 안방에 계신 아버님을 뵈러 들어가기 전에 아버님의 누님이신 시고모님은 내 손을 잡으며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난 그 의미가 뭔지 몰랐다. 나는 사실 아버님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다. 남편과 시어머님 단둘이서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시골에 아버님이 혼자 살고 계신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남편에게 아버님은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말을 못 하는 '어떤 존재'였다. 남편은 '아버지'라고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버님은 수전증이 있는 청각 장애인이셨다(아기 때 누님이 업고 있다가 떨어뜨린 후 청각이 나빠졌고, 군대에 세 번 다녀오신 후에 완전히 청각을 잃으셨으며, 그 이후 수전증까지 생겼다고 들었다)


안방에 계신 아버님은 손을 떨고 계셨고, 듣던 대로 말씀을 못하셨다. 나를 보고 계속 웃기만 하셨다. 인상이 너무나 선한 분이셨다. 그때 처음 뵙고, 나도 내 남편처럼 일 년에 한두 번 아버님을 보는 식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살던 시댁 삼 남매라 그 세 사람이 생각하는 아버지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달라 보였다. 나는 무섭고도 말투가 독한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언젠가는 아버님을 내가 모시고 살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아버님을 '그놈의 화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매 주말 시골에 내려가 아버님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오셨다. 어머님 평생의 한이었고, 짐이었다.


결혼 이후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되었을 때, 아주버님 부부를 만나러 갔다. 아버님을 시골에서 모시고 올라와서 함께 살고 싶다는 내 말에, 아주버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하시며, 모시고 싶으면 모시라고 하셨다. 옆에 있는 형님은 이렇게 말했다.


"안돼, 안돼. 난 반대야. 아버님은 평생 시골에서 사셨는데, 도시로 모시고 올라오면 오히려 힘드실 거야. 그냥 시골에 혼자 사시게 놔둬."


형님의 말에 아주버님은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늙으면 자식이 고향이야.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일단 아주버님 허락을 받은 후 어머님께도 허락을 받고 일을 진행했지만, 계속 어머님이 못하게 방해(?)를 하셔서 시간이 길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머님 마음에 드는 이 넓은 아파트를 융자 끼고 분양을 받자, 그나마 인정해 주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아파트 입주 3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나를 통곡하게 만드셨고,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에 한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아버님 방은 있었지만, 아버님은 보고 싶은 가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급히 떠나버리신 것이다.


6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명절과 제사를 각자 따로 하자는 형님 말씀이 있어, 우리 가족은 형님 댁이 아닌, 충청도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내려갔다 오기도 했다. 아버님을 어머님이 계신 가족 납골묘에 모신 후에는 납골묘로 찾아뵌다. 추석 며칠 전이 아버님 기일이었다. 아버님 기일에 형님 부부는 둘이서 추도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많은 것이 혼란스럽고 힘들었지만, 우리 부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고, 우리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은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평범하지 않았던 시댁의 많은 것들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적응하기 힘들어 상처투성이로 산 세월이 길었지만, 그 안에서 내가 익어지고 익어진 부분도 많이 있을 것이다. 힘들었지만 힘을 내고 살았던 내게 종종 "애썼어"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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