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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부 08화

노점상 할머니와 어린 손녀 이야기

by 채수아

매주 주말엔 서울에 있는 큰딸이 내려온다. 우리 부부는 금요일 밤이면 "내일 뭘 만들어 먹이지?"라는 대화를 아주 자연스럽게 한다. 지난 주말에도 메뉴를 정해 동네 슈퍼마켓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물건이 많고도 채소와 해산물이 특히 싱싱한 곳이었다. 가는 길목에 노점상 할머니와 다섯 살 정도의 손주를 보았다. 할머님은 옆의 두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고, 그 손주는 작은 손으로 고구마 줄거리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신통한 아이라며 칭찬을 하며 그 앞을 지나갔다. "어머니 생각난다." 난 또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슈퍼마켓에서 살 것을 꼼꼼히 다 챙겨서 샀다. 나는 덜렁이지만 남편이 꼼꼼한 편이라 같이 장을 보는 날은 실수가 거의 없다. 돌아오는 길에 그 손주를 보니 아까와 똑같이 고구마 줄거리 껍질을 까는 데에 몰입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무슨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 같았다.


​20여 년 전, 우리 어머님도 내 큰딸과 함께 수원 인계동에 있는 뉴코아 백화점 앞 노점에서 물건을 파셨다. 나 몰래 비밀리에 하셨던 일이라, 얼마 동안 그 일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아이 입단속을 시켰건만, 자기도 모르게 우리 딸은 내게 그 말을 하고 말았고, 난 그 사실에 몹시 화가 나고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더군다나 그때는 매우 쌀쌀한 날씨였던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난 어머님이 고생하신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지금 생각하니 아주 못된 며느리였네) 내 아이가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척 속상했던 것이다. 엄마 아빠가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임에도, 내 딸은 초라한 옷을 입고(어머님은 집에 있는 브랜드 옷 대신 시장에서 사신 형광색 옷을 잘 입히셨고, 그 또한 내 불만이었다) 할머니 옆에 앉아 몇 시간을 떨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속상했다. 더군다나 나는 그 백화점 바로 옆에 사는 동네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께 화를 냈던가? 그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싫어할 걸 아시고, 비밀리에 장사를 하셨던 것이다. 쓰실 돈을 충분히 드렸지만, 어머님은 시골에서 가지고 올라온 곡물들을 늘 하시던 대로 노점에 나가 파셨던 것이다. 손녀가 태어나 어느 정도 크니까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가셨을 뿐. 어머님은 돈도 벌고 재미도 있어하셨던 일이었지만, 난 어머니 입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부끄럽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노점상 할머님들이 파는 물건들을 자주 사는 사람이 되었다. 호박 하나를 사도. 고추 한 바구니를 사도, 늘 싱싱하고 맛도 좋았지만, 그 순간 어머님이 떠올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분가 후에도 여동생에게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제부가 오산 쪽을 다녀오다가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시는 우리 어머니를 보았다고. 하지만 나는 어머님께 안부전화를 드릴 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어머님이 하고 싶어서 하시는 '일'이라고 그냥 받아들였다.


​우리 큰딸이 노점상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으니까. 내가 살아가는 곳곳에 어머님의 흔적이 남아있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과일,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색깔들, 어머님이 잘 만드셨던 반찬들, 어머님과 같이 가서 맛있게 먹었던 식당들... 너무나 많아서 어머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것 같다. 얼마 전에 선배 언니를 만난 장소가, 어머님을 모시고 몇 번 같이 갔던 한정식당이었다. 난 또 언니 앞에서 중얼거렸다.


"언니, 여기 음식, 우리 어머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아... 우리 어머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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