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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20. 2024

만만한 자식

나의 남편은 삼 남매 중 막내였다. 일곱 살이 많은 형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동생들에게 엄격했고, 누나는 어려서부터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해야 했다. 남편이 아주 어릴 때는 어머님이 물건을 팔러 멀리 다녀오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엄마 냄새를 맡기 위해 어머니 옷을 가슴에 품고 잤다고 한다.


나는 어머님이 하신 일의 모든 것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시골에서 농작물을 가지고 와서 수원 노점상에서 파는 일, 튀김과 떡볶이를 파신 일, 그 정도이다. 매주 시골 아버님께 반찬을 갖다 드리고, 시골 논과 밭에서 나오는 팔 것들을 자루에 담아 수원행 기차를 타고 역에 도착하면, 막내아들이 어머님 짐을 나누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착한 우리 남편은 "왜 나만 부려먹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머님의 큰아들 사랑은 엄청나게 지극하셨다. 시누님 말에 의하면, 김을 잘라 가장 반듯한 부분만 큰아들에게 주었고,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세숫물을 떠다 바칠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방이 두 칸이 되자, 그 하나의 방에 아주버님이, 나머지 한 방에 세 사람이 지냈다고 한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님 힘드실까 봐 이불 빨래를 도와드리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많이 했다고 있다. 화를 잘 내지 않는 남편이 고등학생 때 딱 한 번 형에게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온 형이, 엄마도 누나도 집에 없자, 막내동생에게 밥을 차려 달라고 한 것이다. 한참 공부할 시기의 동생에게 밥상을 받는 형이 얄미워, 자기도 모르게 화를 냈다는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우리 엄마 말씀대로 부처님 반 토막 같은 내 남편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님의 만만한 자식 노릇을 톡톡히 하고 산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머님을 모시고 산 것은, 맏며느리가 거부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편한 자식이 막내아들이었으니까. 어머님 말씀 다 들어주고, 어머님께 화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아들이니까. 어머님은 막내아들의 칭찬을 이렇게 하셨다.


"걔는 뱃속부터 효자였어. 월메나 나를 편하게 혔는지 몰러."


그런 자식이었다. 산 같고, 바다 같은 자식이었다. 어머님의 가여운 삶을 가슴으로 이해했던 자식이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큰아들 사랑은 식을 줄 모르셨다. 집에 맛있는 먹을거리가 생기면 늘 큰아들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셨고, 남편 대신 의지하고 사랑했던 아들이었기에 그 정성스러움이 정말 지극하셨다. 시골에 사시는 큰 외숙모님이 나를 특히 예뻐하셔서, 어머님이 시골에 다녀오실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싸서 보내주시곤 했는데, 어느 날 어머님이 가지고 오신 보따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라'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그걸 바로 냉동실에 넣으시고는, 며칠 뒤에 아주버님 집으로 갈 때 조금만 남기고 가져가셨다. 너무나 자주 있던 일이라 난 그 부분에서는 마음을 비우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일들 중에 가장 큰 사건이 터졌다. 시골에 있는, 시댁의 얼마 되지 않는 논에서 해마다 추수를 끝내면, 관리하는 분이 50%, 나머지는 수원의 각 집으로 쌀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 논을 아주버님에게 몰래 주려고 하시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몇 가지 서류를 떼어오라는 부탁을 받은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게 물었다. 발급 용도를 써야 하는데, 뭐라고 쓰는지 어머님께 여쭤보라고. 난 서류를 떼는 것도 몰랐다가 어머님께 여쭤보니, 그제서야 시골에 있는 논을 큰아들에게 주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 난 많이 놀랐고, 남편에게 어머님 말씀을 전달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어머님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어머님을 모시고 살려고 애쓰는 자식인데, 말씀을 하셔도 그러시라고 말할 사람들인데, 왜 그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셨는지 몹시 섭섭했다. 평생 큰아들 바라기 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게, 그래서 가끔은 서운하고, 섭섭하고 그랬다. 오죽하면 내가 절친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차라리 외며느리나 맏며느리면 좋겠어. 중요한 일은 큰집과만 의논하실 때가 많아. 꼭 우리 부부는 허수아비 같은 느낌이 든다니까."


​어머님의 큰아들 사랑은 어머님이 말기 암으로 누워계셨어도 변함이 없으셨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큰아들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여기는 우리 큰딸이 병실에 들어오면, 어머님은 누워서도 박수를 치셨다. 너무나 많이 마른 몸이셨지만,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셨다. 아주버님과 우리 큰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어머님의 기쁨이셨다. 그렇게 사랑하는 두 사람을 두고 어떻게 떠나셨을까,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또한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신 분이셨으니, 그 정도의 절절한 사랑은 이해해 드려야 할 것도 같다.


"어머니, 아주버님은 어머님 돌아가시고, 삼우제 이후 뵌 적이 없어요. 형님이 시댁과 연을 끊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나 봐요. 삼 남매 우애 있게 지내라는 어머님 유언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어머님이 이해하세요. 그리고 어머님의 사랑이었던 큰손녀는 부모와 두 동생을 깊이 사랑하는 의젓한 맏이로 잘 살고 있어요. 어머님이 제게 그러셨죠? 어떻게 저런 아이를 낳았냐고요. 제가 봐도 그러네요. 어떻게 저렇게 따스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가질 수 있을까 자주 생각해요. 저희 가족 모두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는 거 아세요?  다 보고 계시죠? 저희 가족 위해 하늘나라에서 기도해 주고 계시는 거, 느끼고 있어요. 어머니, 어머니 만나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저를 사랑해 주신 시간이 훨씬 더 많으세요. 이 땅에서는 참으로 고단했던 삶이셨지만, 그곳에서는 편히 잘 쉬세요. 감사했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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