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처럼 우리를 돌봐주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국어 교육과였으니 국어과 교수님이 담당하셨는데, 나를 지도해 주신 또 한 분의 교수님이 계셨다. 바로 E.R.C.(영어 연구회) 동아리 지도 교수님이셨다. 국어와 영어 과목을 특별히 좋아했던 나는 그 동아리에 들어가서 교육학 원서를 공부했다. 굉장히 지적이시고 친절하신 교수님은 모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는데, 아쉽게도 중간에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이 우리를 지도하시다가 다시 그 교수님이 우리 학교로 돌아오셨는데, 강의 중에 캐나다에서 생활하던 이야기를 잠깐씩 들려주셨다.
그중 한 가지가 '더치페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친하게 지내던 부부의 초대를 받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 아내가 그날의 식사비는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남편에게 계산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식사 후 1/N이 자연스러워 교수님도 나중에는 그것이 익숙해지셨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들은 이야기이니, 그 말씀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모두들 이해불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1/N로 계산하는 일이 별로 없다. 모임에 나가도 돌아가면서 식사비를 내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1/N이 적용된 때는 시어머님과 관련된 것이 많았는데, 행사에서 나온 비용을 형님과 둘이서 똑같이 반씩 계산을 해온 것이다. 이혼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누님은 늘 열외였고, 나중에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후에도 그건 계속 유지되었다. 시누님은 본인이 할 만큼 어머님께 따로 선물을 드리곤 했다. 마지막 1/N은 말기 암에 걸리신 어머님에 대해 쓴 비용을 삼 남매가 몇 번에 걸쳐 형님 통장으로 입금을 했던 일이다. 당연히 병원비와 간병비가 포함되었고, 작은 파스 하나, 연고 하나, 물티슈 하나까지 그 비용에 포함이 되었는데, 우리 부부와 시누님은 소소한 것들은 그냥 자기 스스로 해결했다. 그런 와중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나는, 결혼 시작부터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온 내 힘들었던 삶과 혼자서 어머님께 드렸던 많은 돈들이 떠오르며, 마음속에서 서운함이 물밀듯이 솟아올라 마음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또한 삼 남매만 모여서 결정을 할 때가 많았는데, 거의 아주버님의 의견이 많이 반영이 되었다. 어머님의 작은 아파트를 판 돈을(어머님은 입원 중이셨고, 상태가 위중하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다) 아주버님이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1/3로 나누어 입금을 하셨다. 20여 년 전, 어머님이 갑자기, 주말에 하루라도 쉬고 싶은(시골에 다녀오신다 해도) 집을 어머님 마음대로 계약을 하셔서, 계약금(내가 어머님께 통장으로 만들어드린 돈)의 나머지 돈과 여러 살림들을 사들인 총액의 1/2을 입금하라는 형님 전화 한 통에 학교에서 대출을 받아 몇 년에 걸쳐 갚았었는데 말이다. 그걸 다 아시면서도 나는 그걸 남편을 통해 통보를 받은 것이다. 그때도 말 한마디 안 하고 넘어갔지만, 나는 몹시 서운했었다.
그런데 감사할 일은 이미 어머님 콘도처럼 준비되어 있던 그 집이 있어서, 내가 건강을 완전히 잃은 후에 17년의 합가 후 분가가 그나마 좀 쉬었을 수도 있던 것이다. 참 힘든 시집살이였지만, 그랬었기에 나는 분가 후에 어머님의 깊은 사랑을 철철 넘치게 많이 받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 수 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1/N이 아니라, 한 푼도 못 받았다 해도, 감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던 집이었다. 남는 건 감사와 사랑뿐이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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