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교육 대학에 입학하려면 키가 150센티 이상이어야 했다. 지금도 그 규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친구 연희네 집에 가면 키 157에 몸무게 46이었던 나를, 연희 엄마가 무척 부러워하셨다. "그래도 저 친구 정도는 되어야지?" 연희는 나보다 더 작고 더 마른 조그만 여대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처음 사귄 친구가 연희였다. 우리는 학번이 붙어있다 보니 조별 과제를 같이 하며 친해졌다. 그러고 보니 하늘이 주신 인연일 수도 있겠다.
연희와 함께한 7명의 대학 모임은 참 정겨웠고 편안했다. 그중 내 속 마음을 제일 많이 털어놓았던 친구가 바로 연희였고, 연희와의 4년은 너무나 따뜻하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연희를 매일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많은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하기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친구들은 가까이 사는 경우가 많지만, 대학 친구들은 그렇지가 않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졸업을 하자마자 우리는 3월에 발령을 받았다. 나는 화성군 송산면에 위치한 송산국민학교로, 연희는 인천에 있는 학교로.
그때부터 각자의 학교에서 열심히 살다가 결혼을 했고, 난 삼 남매의 엄마가, 연실이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졸업 후 둘이서 따로 만나기는 어려웠고, 방학 때마다 일곱 명 그 모임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나는 막내며느리이고. 연희는 맏며느리였다. 10여 년 전 시어머님이 치매 요양 병원에 입원하신 후, 연희가 명절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동서를 명절날 아침에 오라고 했고, 자기에게 주려는 '음식재료비'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일 년에 두 번 치르는 명절인데,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멀리서 오는 세 아이를 둔 워킹맘 동서를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었단다.
연희는 그러고도 남을 친구였다. 그 마음은 순도 100%의 진심일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다. 마음을 주고 눈빛을 주며 아이들을 녹일 줄 아는 교사였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고아원 아이를 데리고 매주 등산을 다니면서 그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킨 경우도 있었다. 연희를 만난 사람들은 복이 많아 그렇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저렇게 많은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사니 그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교사로 살면서, 며느리로 살면서 종종 연희 생각을 했었다 분명 연희는 내게 좋은 물을 들여주었다. 연희 같은 진주를 알아본 스무 살의 내 눈에 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