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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ul 27. 2024

영창 피아노

​남편과 둘이서 외식을 했던 어느 날, 우리가 들어간 식당 바로 옆에 '영창 피아노' 가게가 있었다. 유리벽으로 보이는 갈색 피아노들이 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 하나하나에는 가격표가 붙어있었는데, 내 마음에 쏙 드는 피아노의 가격이 4백8십만 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영창 피아노! 나는 영창 피아노를 좋아한다. 우리 큰딸이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친정 부모님이 사주신 피아노이기 때문이다. 그 피아노는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은 내가 교대에 다닐 때 내게 피아노를 사주지 못한 미안함이 늘 있었다고 하셨다. 그때 우리 집에는 교사이셨던 아버지 친구가 쓰던 낡은 오르간이 있었다. 난 그것으로도 충분했었고,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른 기억이 없는데, 왜 두 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사셨던 걸까. 2백만 원짜리 영창 피아노를 우리 집에 들이시며, 두 분은 참 행복해하셨다.


​부모님의 그런 마음을 삼 남매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자식이 조르지 않아도, 해주어야 할 것을 못 해주면 그것이 가슴에 남아있다는 것을. 나의 경우에는 물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미안함. 놀이터에서 많이 놀아주지 못했던 기억이 있고, 여행을 더 많이 못 갔던 기억이 있고, 함께 쇼핑을 더 많이 못 해준 기억이 있다. 많은 엄마들이 충분히 해주었을 만한 그 일들이 내겐 아주 힘든 일이었다.


​몸이 약한 교사로 살면서 그나마 내 에너지가 반짝 빛났던 곳은 학교였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나는 내 아이들을 잘 돌볼 만한 힘이 없었다. 어린 막내딸이 내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가자고 졸랐을 때, 난 세 번 중에 두 번은 거절하고 침대에 누웠었다.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엄마를 하루 종일 기다렸을 텐데도, 이 엄마는 아이를 자주 서운하게 했다  내 기억 중 가장 아프고도 선명한 것이 있다. 그날따라 퇴근 후에 몸이 몹시 피로하여 말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아이를 돌봐주시던 시어머님께 겨우 인사만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장아장 나를 따라 들어온 막내딸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열린 방문을 살며시 닫고 나갔다. 그 모습이 오랫동안 미안했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내 아이들에게 못 해준 것들에 대한 기억은 모두 내 에너지 부족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그래서 내 몸이 좀 나아진 후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가족 모두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서점에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여행을 간다. 그래도 감사한 것이, 함께하는 그 시간을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부모와 같이 여행하기를 꺼린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삼 남매는 아직도 함께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큰딸의 나이가 서른이 넘었고. 아들도 서른을 향해 가고 있으니, 나도 몇 년 안에 할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손주가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난 그 아이들과 함께 그네를 타는 상상, 과자를 함께 만드는 상상, 동화와 동시를 들려주는 상상을 한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내 상상은 아름다운 현실로 다가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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