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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부 01화

영화 같았던 내 인생

by 채수아

"그 화상, 그 웬수!"


어머님의 깊은 한숨과 함께 자주 나오는 이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남편이자 나의 시아버님인 분을 칭하는 이 말!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너무나 심하게 나를 괴롭힌다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님께 모진 말을 했었다.


"어머니, 여기서 며느리들 괴롭히지 마시고, 이젠 시골에 계신 아버님과 함께 사세요."


자라면서 부모님께 한 번도 대든 적이 없던 내가, 살다 보니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자주 어머님을 미워하고, 나 자신까지도 미워했다. 수녀가 되어 평생 봉사하며 살고 싶었던 내 가슴속 소망 대신, 상처 많은 한 집안의 '온기'로 살아보겠다던 내 의지는 그렇게 자주 깨어지고 있었고, 나는 내 이상과 너무나 다른 현실 속에서 절망감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청각 장애와 수전증이 심하셨던 아버님은 오랜 세월을 시골 작은 집에서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들풀을 보며 사셨다. 어머님은 막내인 내 남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두 아들만 데리고 수원으로 올라오셨고(딸은 친정에 맡긴 후 몇 년 후에 데리고 왔는데, 그게 우리 시누님에게는 아주 큰 상처였다) 아버님께는 일주일에 한 번 다녀오시는 식으로 몇십 년을 그렇게 사셨다. 방 두 칸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그때는 감히 엄두도 못 냈지만, 나는 결혼 6년 후 우리 집을 처음으로 마련한 뒤에 아버님을 시골에서 모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도 방이 세 칸이니 어머님과 아버님이 각방을 쓰시면 될 거라 쉽게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어머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평소에 동네 친구들에게 남편이 없다고 말해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계획을 또 세웠다. 돈이 모자라 사서 이사 갈 형편은 안 되고(융자를 끼고 분양받은 상태였고, 브랜드 없는 싼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이도 둘이 있으니, 아예 방이 네 개 있는 넓은 곳으로 전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우리 부부는 어머님을 모시고 집을 보러 다녔다. 정말 내가 원하던 집이 나타났다. 삼성 부장이신 분이 영국으로 발령이 났는데, 5년 후에 돌아올 예정이니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하셨다. 전세금도 싸게 5천만 원에 해주신다고 했다. 아버님께 딱 좋은 1층이었다. 나는 신이 났다. 야호!!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머님이 평생 전세로 산 것도 억울한데, 이제 겨우 내 집 하나(어머님은 우리가 사는 집을 늘 내 집이라고 하셨다) 마련하자마자 또 전세로 가기 싫다고 하시며 안 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님 모실 계획은 또 미루어졌다.


​그 사이 시누님이 이혼을 하신 후, 분식집을 시작했다. 나는 둘째 아이 육아휴직 중이었고, 어머님은 시누님네 두 손주를 돌봐주기 위해 그 집으로 가셨다. 애들이 초등생과 중학생인 남매였는데, 어머님은 우리 집이 그리워 매일 놀러 오시곤 했다. 그 와중에 시누님이 오산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자, 어머님은 우리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만들어 드렸던 500만 원 통장으로 계약금을 치르고 오셨다. 나머지 돈은 물론 두 아들 몫이었다. 내 남편은 우리 집 대출이 있어서, 나와 아주버님이 대출을 받아서 18평 아파트 나머지 돈을 다 해 드렸다. 어머님은 시누님네 계시다가 얼마 후 다시 우리 집으로 오셨고, 오산 아파트는 어머님의 별장 역할을 했다. 주말마다 하룻밤 주무시고 오시는 장소. 그리고 시골에 계신 아버님을 그 집으로 모시고 와서 어머님은 내 예상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만 아버님께 다녀오셨다. 불쌍한 아버님은 시골보다 못한 답답한 아파트에서 몇 년을 더 사셨다. 그럴 줄 알았기에, 계약 해지를 하자고, 아예 시골에서 아버님을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내가 그리도 서둘렀지만, 일은 어머님 고집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다시 계획을 세웠다. 아예 어머님이 싫어하시는 전세가 아닌, 방 네 개가 있는 넓은 저층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당연히 대출이 낀 상태였다. 각 방 쓰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와 세 아이, 대가족이 살 집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매일 아버님 얼굴을 보는 게 어머님은 너무나 싫으셨겠지만, 어머님도 그냥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2002년 1월 3일, 우리는 드디어 이사를 했다. 하지만 이 집을 분양받게 만드신 주인공은 함께하시지 못했다. 입주하기 세 달 전, 아버님은 오산 그 작은 아파트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님은 그 전날에 시골에 다녀오신다고 떠났다가 밤에 들어가 보니 아버님은 그렇게 이 세상과 하직하고 계셨던 거였다.


너무나도 죄스럽고 슬픈 우리 가족의 역사...


나는 그 당시 셋째 아이 육아휴직 중이었다. 나는 아버님 돌아가시고 한 달을 눈물로 살았다. 아버님 모시고, 손주들 얼굴 매일 보시며 살게 해드리고 싶은 내 소망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님에 대한 죄스러움은 내 가슴의 큰 한으로 남아 있다.


늘 입버릇처럼, 나 죽으면 니 아버지 옆에 묻지 마라, 하시던 분이 말기 암 진단을 받기 2주 전 우리 차 안에서 어머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나 죽으면 충청도 아버지 옆에 묻었다가 빨리 수원 가까이로 옮겨라."


나는 그 말씀에 굉장히 놀랐었고, 어머님 그 말씀으로 가까운 곳에 가족 납골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시골에 계신 아버님도 어머님 옆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나는 이렇게 영화 속에나 등장할 만한 시댁에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왔다. 그동안 얼마나 깊은 고뇌와 한숨과 눈물이 있었는지...



※ 사진 : 헤라의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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