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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6] 고르너그라트



[고르너그라트]



사실은 체르마트에서 가장 기대하던 순간은 바로 오늘 이 순간이었다. 체르마트에서 마테호른을 가장 예쁘게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여행. 체르마트에 머무는 4일의 시간 동안 가장 맑은 날이라는 오늘, 그래서 마치 기다렸던 크리스마스선물을 열어보듯 고르너그라트로 향했다. 지난 며칠 간 날씨처럼 오락가락했던 마음도 조금은 중심이 잡힌 기분. 그래서였을까. 오늘은 멀리 시내까지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든 마음먹기 달렸다는 건 역시 맞는 말이었던 걸까.



나처럼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던지, 고르너그라트 전망대로 향하는 기차는 더 들어설 틈조차 없을 정도로 만석이었다. 덕분에 비좁고 힘들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기대와 환희 덕에 불편함보단 더 큰 기대감으로 기차에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열차가 협곡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마테호른의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기도 했고.


하지만 어쩐 일인지 카메라에 영 손이 가지 않았다. 마테호른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지난 며칠 간 충분히 담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이 순간을 사진 속에 남기기보다 더 오래 ‘현재진행형’으로 느끼고 싶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라곤 저 산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가는 이 찰나의 시선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오래도록 거기에 있는 그 산을 돌고 돌아 우리가 바라 볼 수 있는 것도 결국 이 우뚝 솟은 산의 작은 단면 뿐이란 것.



열차는 길어지고, 내 생각도 열차칸의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나를 이 곳으로 이끌어온 저 산의 위용과, 그리고 그 앞에서 이 순간의 행복을 남기려 분주히 눌리는 셔터소리들. 와-하는 경탄의 신음도 잠시, 나는 결국 또 이 곳에 서서 작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마테호른의 우뚝 솟은 장엄함보다, 저 협곡 아래 이제 막 움튼 봄을 증거하듯 푸르게 녹아내린 빙하호들, 헐떡이는 사람들의 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곳 저곳을 유영하는 작고 검은 새들, 그리고 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생을 증거하는 작은 풀잎 한포기….



30분 즈음 뒤 열차가 다시 도착하고, 사람들은 밀려온 만큼 가파르게 쓸려가는데, 어쩐지 이 곳의 이 작고 가만한 것들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마테호른을 등지고 선 이름 모를 ‘무명’의 산들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았다. 멀리-보이는 이 산들은 마테호른의 배경이 되어주는 걸까? 아니면 저기 그대로 있는 이 아름다움들 사이 우열을 가리는 건 고작 한낱 인간의 착각일 뿐일까. 햇살은 따스하고, 생명은 움트고, 나는 또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마음 속에서 ‘충분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하다. 모든 곳을 보지 않았어도, 가이드북에 있는 많은 스팟들을 지나쳤어도, 나는 그냥 이 곳에서 나만큼 머무른 것으로 충분했다. 순서도 셈도 없이 지나가는 삶. 저 우뚝 솟은 각자의 산맥들처럼 우리도 그냥 각자의 모습대로 우뚝 솟아있을 순 없을까?

돌아가는 길, 어쩐지 자꾸 졺음이 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덜컹이는 기차에서,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을 꾸었다. 어쩌면 그 꿈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허튼 생각과 함께.







거대한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작은 삶의 움직임들에 경탄한 오늘.


남은 생은 나답게, 어쩔 수 없이 작고 신경쓰이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그게 멋지지 않더라도, 그게 1등이 되는 길은 아니더라도, 그게 가장 나다운 평화로움 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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