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7] 골든호른 앞에서

[골든호른 앞에서]


가이드북과 스위스 여행 카페에서 이른바 ’체르마트 필수코스‘에 빠지지 않고 꼽히는 ’must-see’ 중 하나가 바로 해 뜨는 시간 붉게 물드는 마테호른인 ‘황금호른’이었다. 그래서 여행에 오기 전부터 황금호른을 보기 위한 일정을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막상 여행을 하며 ’연이 되면 보겠지‘ 따위의 느긋느긋한 마음가짐만 먹게 되면서 황금호른 역시 기억의 뒷길로 잊혀지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다시 보지 못할 기회일수도 있는데- 하며 원래의 내가 부지런히 자기주장을 하는 동안, 변해버린 현실의 나는 '뭐 일어나 지면 보자'고 한걸음 물러나곤 했다.


그런데 하필, 체르마트를 떠나는 마지막 날, 이상하게도 눈이 새벽 5시에 떠지고 만 것이다. 흠- 아직 추운데- 하고 뒤척거리려다, 말이 씨가 되어버린 상황에 ’일어나진‘ 나의 마지막 양심을 담아 옷을 걸쳐입고 길을 나섰다. 역시 인생은 추구하고 갈급해하지 않는 자에게 얼토당토 않는 복을 내리는 게 확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수록 드는 생각인데 아둥바둥 하지 말고 알아서 자기 속도와 중심대로 살다보면 나머지 뭔가의 때와 잘 맞아 성공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무튼 그리하여 오래도록 기다린 황금호른을 맞이하는 시간.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듯 붉게 물든 설산의 꼭대기와 점점 퍼져나가는 황금빛 마테호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사실 정말 ‘사진으로 남기기’ 예뻤을 뿐, 사실 나에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에이, 뭐 사진에서 보던 것만큼 붉지도 않고- 뉘엿뉘엿 시나브로 드는 물 때문에 황금빛 물이 드는줄도 몰랐네- 싶은 심경이랄까. 그래서 그래 어느정도 봤으니 숙소 가서 좀 더 누워 쉬자- 하고 발길을 돌리자, 내가 나올 땐 보이지 않던 한 무리의 ‘한국분들’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


후… 아니 뭐가 더 있으니까 다들 이렇게 서 있겠지?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다 말고 손해라도 볼세라 다시 황금호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다들 우와 저거봐 하고 서로 부둥부둥거리며 소원을 비는 사이, 대충 입고나온 옷틈새로 추위는 밀려오고, 나는 여전히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더 있어봐야 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이 집단동조를 이겨낼 만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간 얼레벌레 황금호른은 끝나고, 모두의 뒷모습을 따라 돌아오며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내가 무언가 ’기대하며 바라보고’ 사는 것들도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모두 그렇다니까, 모두 고대하고 감동한다니까, 내게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한 발을 떼 내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삶. 어쩌면 삶의 아이러니는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뜨는 해의 명쾌함과 달리 내 발걸음은 뉘엿뉘엿 무언가에 끌린 듯 느려져갔다.


어쩌면 그 순간 내 의지대로 돌아섰다면 달라졌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 덕에, 나는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멍하니 먼 산의 뜨는 해를 가만히 지켜본다.




이전 17화 [순간의, 스위스 #16] 고르너그라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