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8] 루체른의 너른 품


루체른의 첫 느낌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녀 이리저리 정신없는 와중에도 루체른의 드넓은 품은 모두를 품고도 남는다는 듯 여유로이 느껴졌다. 정신없고 사람 많은 곳이라면 늘 질색팔색을 하는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체른의 분주함은 미워할 수 없는 느릿하고 평온한 리듬 속에서 이어지는 듯 했다.



팔자에 없는 새벽 기상과 기차 연착으로 인해 이리뛰고 저리뛰며 나가버린 멘탈 때문에 체크인을 하고 방에서 꼼짝없이 쉴까 생각했는데, 루체른 역에 내려 푸른 호수를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서 짐을 훌렁 던져두고 밖으로 향했다. 호숫가를 따라 두런두런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성벽 위를 산책하며 주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번화가의 공연을 즐기면서도 나름의 사이를 두고 서서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사람들까지.



내가 이 도시에서 느낀 그 ’따뜻함‘의 정체는, 아무래도 여백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취리히와 비슷한 구조처럼 보였지만, 루체른에는 너른 호수만큼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는 사람들의 미소가 늘 눈에 띄었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지친 마음의 틈이 조금은 열리는 기분. 생각보다 호텔 방도 작고 시내 역시 몇시간 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하염없이 호숫가를 걷고 사람들의 미소에 답례하다보면, 어쩐지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유와 여백, 그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은 여백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지저귀는 새들처럼 언제 날아와 내게 어떤 이야기를 풀어 놓아도 괜찮을 사람. 내 여백 덕분에 숨막히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잃지도 않도록 해주는 사람. 나는 늘 그런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스위스에서의 긴 시간동안, 조금은 그런 사람으로 변했을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다 스르륵 눈을 감는다. 어쩌면 이 달콤한 낮잠처럼, 내 삶의 아주 작은 틈이 벌어지며 내게 보여줄 미래의 여백들이 언젠가의 나를 완성해 줄 것임을 믿는다. 슬렁 슬렁, 모두가 여유롭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빌며.





이전 18화 [순간의, 스위스 #17] 골든호른 앞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