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베른]
오늘은 원래 계획엔 없었던 베른에 방문했다. 이미 기차를 타고 여러 번 베른에서 환승을 하기도 했고, 17년 전 유럽여행때 베른에 들렀던 적이 있었단 이유로 애초에 계획에선 제외됐던 도시였다. 그러나 환승을 하려 지나갈 때마다 보이던 베른의 풍경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푸른 강, 높은 다리,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많은 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곰의 도시 베른에 가면 곰돌이 인형이라도 하나 건지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비밀이지만, 아무튼 ‘더이상 자연은 없어’ 선언 이후 붕 뜬 시간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바로 베른이었다.
아침일찍 기차를 타고 베른으로 향하는 길, 기대가 없었던 탓인지 왠지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한 베른. 이 곳을 내가 왔었나 할 정도로 내게 색다른 감흥을 주는 거리들에 나는 ‘기억의 왜곡’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분명 21살의 배낭여행 시절 내게 베른은 별 감흥 없는 도시였다. 아마도 그 당시의 내가 너무 지쳤거나, 혹은 너무 비싼 스위스 물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신포도’처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과 이유들은 생략된 채, 언제나 그렇듯 내 머릿속엔 하나의 판단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베른은 별볼일 없는 도시로. 그러나 베른의 구시가지를 걸으며 나는 순전한 희열에 들떴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독특한 형태의 분수들, 그리고 거대한 시계탑을 움직이는 하나하나의 위대한 조각품들까지. 거리 하나가 하나의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베른은 내게 증명해냈다. 역시는 역시라던가. 그리고 패자는 역시 내 머릿속의 편견. 직접 다시 경험해 보고 나니, 내가 가진 편견들이 얼마나 편협한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덕위를 올라 바라본 베른은 정말 중세의 시간에 멈춰버린 듯 보였고, 그 아래를 도도히 흐르는 새푸른 강물은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을 내게 보여주는 듯 했다. 땀방울이 식을 정도로 솨-하고 불어오는 바람과, 만개한 꽃들 사이의 향기, 그리고 사람들의 편안한 미소까지. 언덕 위의 곰공원과 장미공원을 지나자 어느새 내 마음은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세상에, 여기 사는 사람들은 늘 이런 풍경과 여유를 즐긴다니. 너무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찾은 곳은 잘 알지 못했던 작가인 파울클레의 전시관이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니었지만, 공원과 골목길을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나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만난 파울클레의 그림들은 생경했지만 훌륭했다. 늘 추상화가 어렵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그림 속에서 생명과 자연이 ’추상‘이 되는 과정을 엿보고 나니, 이 추상의 과거를 거슬러 떠올리는 일이 너무 즐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이유 있는 추상들‘을 따라가며 점점 나는 그의 그림속에서 서사를 떠올리는 즐거움에 빠져버린 듯 했다.
그렇게 오래 전시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는 오면서 택하지 않았던 주택가의 길을 택해 다시 시가지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골목과 마을에 끌린다. 사람들의 삶이 묻어있는 곳, 늘 조용히 산책하듯 걷는 길들에서 어쩐지 모를 정 같은게 느껴진달까. 그리고 그 도시와 친해지는 방법은 ’골목들‘에 있음을 나는 안다. 주택가와 골목길들을 돌다보면 느껴지는 도시의 향취. 그 조각들을 모아 모아 나는 하나의 도시를 완성해내는 걸 좋아하니까.
그리하여 베른, 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나는 새롭게 발견한다. 골목골목 높이 솟은 나무들, 그리고 골목마다 그 골목을 설계한 건축가들의 이름이 붙어있는 거리거리의 취향들을 발견하는 재미, 꽃과 숲이 이룬 골목을 거니는 사람, 또 사람. 그렇게 베른은 나에게 문화유산으로 박제된 도시가 아닌, 살아 숨쉬는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오랜만에 무작정 걷던 이 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젠가 나는 베른에 한 달 즈음, 살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