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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21] 루가노에서



모든 건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어차피 루체른을 떠난다면, 더 멀리 이탈리아 근방까지 한 번 가보지 뭐, 그정도의 안이한 생각 정도. 덕분에 갑작스럽게 스위스 남부 루가노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 아무 생각 없는 여행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고민을 하기가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리저리 알아보고 공부해야 하는 여행지 말고, 그냥 단순하고 명쾌하게 어느 도시를 찍어 훌쩍 떠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뜻밖에 루가노로 향했다. 오기 전엔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도시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니. 설레는 여행 영화처럼 뜻밖의 행운과 좋은 일들로 엮일 줄 알았던 여행은, 그러나 열차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창밖을 보며 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시비조로 나를 툭툭 치며 자리를 바꿔달라 하는게 아닌가. 


다행이 거절 의사를 밝히고 잘 마무리 됐지만, 기차에 탄 내내 나쁜 기분이 드는 건 멈출 수 없었다. 멀쩡히 잘 앉아가고 있는 사람을, 부탁도 아니고 명령조로 쿡쿡 찔러가며 저쪽으로 가라니. 음악을 들으며 기분나쁜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성난 마음은 아무리 잔잔한 산과 강을 보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소심하게 째려보며  경계하다보니, 결국 루가노까지의 두시간의 여정이 끝나자마자 기진맥진 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루가노는, 사실 특별하다기 보다 어느 이탈리아의 휴양지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거리마다 에르메스, 프라다, 디올 등등 온갖 종류의 명품 샵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말을 하며 지나다니는 도시.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곳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추레한 차림의 여행자가 가방을 들춰메고 활보하기엔 거리도, 사람들도 너무나도 빛나는 느낌. 그리고 기차에서부터 느꼈던 묘한 시선들이 더더욱 집요하게 나를 파고드는 느낌도 들었다. 다른 스위스 도시에선 느끼지 못했던 ‘아시아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이 더더욱 깊게 각인되는 느낌이랄까.



평화로운 공원과 한낮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기분을 전환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또다시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이 로션 샘플을 나눠주기에 하나 받았는데, 갑자기 바로 앞의 자기네 상점으로 오라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긴장이 풀어져서 인지 순순히 따라갔지만, 갑자기 나에게 기계로 시술을 해준다기에 아차! 싶었다. 늘 경계심 많고 사람을 안믿는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래서 곧바로 기차 시간이 다가온다며 서둘러 샘플 로션을 놓고 도망치듯 거리로 나서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벗어났다.



이런 일까지 겪고나니 이 도시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서너시간 정도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이미 지친 느낌이랄까.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루체른으로 향했다. 며칠 머물렀다고 익숙해져서인지, 루체른으로 돌아와 저녁거리 장을 보면서 괜시리 안심이 됐다. 그래도 조금 불운한 하루를 이렇게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도감.



여행의 마지막 즈음 마음이 많이 느슨해진 내게, 오늘 하루는 정신 차리라고 죽비를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모르는 채로, 대충의 하루를 보내려면 이렇게 된다는 교훈도 얻었고.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을 고려해 선택하기. 하루의 고생을 통해 또 큰 교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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