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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에필로그


[긴 여행의 끝]



드디어 긴 여행이 끝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끝이 올 때마다 서운하면서도 동시에 행복하기도 한 마음이 든다. 오늘 하루도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취리히미술관에서 생각보다 너무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나 행복했고, 특히 고흐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그 어떤 여행보다 완벽한 마무리였달까?


고흐의 그림은 실제로 마주할 때마다 온 몸을 하나하나 붓으로 긁어내는 듯 한 전율을 준다. 털이 하나하 곤두서면서 동시에 그가 이 그림을 그리던 마음에 가장 가깝게 ‘공감’할 수 있달까. 그가 그림을 그리던 시절의 고통과 마음의 짐들이, 반대로 나에겐 가장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그림을 남기며 절규했을텐데, 하지만 나는 이렇게 그려낸 그 고통의 소용돌이들 덕에 그의 작품을 가장 사랑한다. 어쩌면 내가 고흐를 사랑하는 방식은 아이러니 그 자체인지도.


대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몸소 느끼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갖고나니, 이 여행의 끝이 불안하거나 슬프진 않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나는 나를 위해 온전히 이 시간을 즐겼구나 하는 생각. 스스로를 위해 이렇게 오래도록, 온전히, 시간을 내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어쩌면 입사와 함꼐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 이 또한 아이러니네. 회사 덕분에 시간을 내 스스로를 돌보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방법을 순수히 잊게 만든것도 내 이름 앞에 회사가 들어간 순간부터라니. 여러모로 이 여행과 마지막 하루가 내게 인생의 아이러니를 알려주는 듯 하다.



긴 여행의 끝에 ’돌아가기 싫다‘는 마음이 든건, 어쩌면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내내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나 자신이 자신으로 온전히 살 수 있는 그 ’익명의 도시들‘이 내게 주는 홀가분함 덕에 오랜만에 숨이 틔였던 것 같다. - 실제로 숨구멍이 트이기도 했는데, 스위스에 오자마자 역류성 식도염과 비염이 씻은듯 나았기 때문이다. 역시 회사만 쉬면 건강은 따놓은 당상인가.- 여하간, 그 홀가분한 마음 덕에 몸도 마음도 근 몇년 간 느낄 수 없던 가벼움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다 놓고, 자연 앞에서 내 온 몸을 맡긴 채,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며, 매일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이 긴 시간동안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일까? 지난 일기들을 되짚어보니 사실 늘 해오던 생각을 조금씩 이어붙인 기분이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모든 깨달음들이 ‘체득’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발로 걷고, 자연 앞에 서서 작아지고, 또한 동시에 이 작은 먼지같은 괴로움들의 크기를 몸으로 느꼈다. 이 산은, 이 만년설은, 이 강은, 우리의 하찮은 문제들 앞에에서도 저리 자기대로 존재하지 않는가. 생각만 해오던 ‘우주의 먼지론’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고 나니, 내 안에 어떤 단단한 심지가 박힌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 여행의 기억이 가물거려지는 날이 와도, 내 마음에 말뚝처럼 박혀 단단히 나를 묶어줄 무언가.



그리고 돌아가는 비행기에 앉아 다시 내가 돌아갈 자리를 생각한다. 아마도 내가 떠나온 시간이 언제 지나갔냐는 듯이 똑같은 일상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언제나의 여행 끝이 그랬듯, 반나절이면 여행자인 나는 오직 까맣게 탄 나의 피부 안에서만 볼 수 있겠지. 그래도 이번 여행의 끝에 내 눈빛 속에서 고요와 평안이 읽혔으면 하고 바라본다. 저 높은 산을 뽑아낼 수 없듯, 내 안에 뿌리내린 이 시간의 힘이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기를. 그리하여 내가 겪은 순간들이 내 안에서도 경이롭게 피어나기를.



너무나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


내 방식과 기준대로, 완벽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100점을 준다. 빠지지도 넘치지도 않는, 완벽한 점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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