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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22] 끝이 보일 때 쯤, 취리히



끝을 예감하면 항상 그 끝이 덜 아프게 멈칫거리는 버릇이 있다. 한 달 간의 긴 휴식을 마치는 시간, 또다시 버릇처럼 나는 머뭇거리며 이 끝을 외면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냥 별 것 하지 말고 호텔가서 쉬다가 집에 가야지. 그런데 뭔가 아쉬운 맘이 들었다. 처음도 끝도 그냥 다 좋으면 안될까? 왜 흐지부지하게 끝내야만, 끝이란 걸 티내야만 늘 직성이 풀리는걸까? 침대에 누워 하루를 슬렁 정리하려다, 문득 든 이 생각에 매여 나는 가지 못해 아쉬웠던 곳들을 골라본다. 그리고 가이드북 한귀퉁이에서 이런 말들과 만났다.


“쇠퇴한 공업지대가 ‘공업디자인’으로 재탄생된 곳“


아주 짧은 소개글과 함께 이제 ‘핫해지는’ 곳이라는 설명이 덧붙어있는 이곳, 취리히 웨스트. 아직 취리히 안에 못가본 유적지도, 들러야 할 상점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이 곳이 마음에 밟혔다. 무엇인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에 이상하리만치 집착적인 환호를 보내는 나이기에, 어쩌면 이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훌쩍 가방을 메고 기차를 타 취리히 웨스트 지역으로 향했다. 유적지 아니면 유려한 자연환경만 있다고 생각했던 스위스에 이런 곳이 있다니! 처음 기차에서 내려 만난 취리히 웨스트 지역의 느낌은 꼭 우리나라의 ‘성수동’ 같은 느낌이란 것이었다. 통신사 등 아이티 기업들이 입주한, 도심에선 보기 어려운 네모반듯한 최신식 건물들 사이사이로 공장이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터 아래 새로운 예술들이 움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10분 즈음 걷다보니 가보고 싶었던 디자인 뮤지엄에 닿을 수 있었다. 마침 전시의 주제도 ‘수선 혹은 수리‘한다는 것. 전시의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전시의 배치나 생각,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들을 담기 위해 모아둔 디자인 요소들이 하나하나 너무나 꼼꼼하고 동시에 안정감을 주게 해서, 너무나도 스위스스러운 전시란 생각을 들게 했다. 바로 옆에 게임 디자인에 관한 전시도 함께 볼 수 있었는데, 실제로 체험해보는 다양한 게임과 그 게임 디자인에 숨은 가치관들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디자인 뮤지엄을 나와 다시 취리히 웨스트 지역의 중심가를 향해 가는 길, 너무나도 따뜻한 색감의 공원과 산책로, 오밀조밀한 파스텔 톤의 아파트들을 넘어서자 마치 히피들의 성지같은 느낌을 주는 프라우 게롤드 가든이 나타났다. 얼기설기 폐 컨테이너들 가운데 프랑스 풍의 좌판과 아프리칸 무드의 물건들을 파는 가게, 그리고 그 사이로 너무나 평온히 하루의 반을 즐기는 사람들.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을 틔우고 있었다.



무엇인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 수명이 다했다고 여겨지는 무언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일. 어쩌면 ’마음으로‘ 끝 너머의 시작을 보는 그 힘이 진짜 ’예술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차분히 멈춰있는 듯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이 곳 취리히 웨스트, 여행의 마지막 장면에 이곳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덕분에 충만했다. 끝이라고 꼭 끝다울 필요 없이, 아니 어쩌면 질질 끌며 예상되는 드라마 같은 마지막을 맞을 필요 없이, 오늘이 마지막 하루더라도 끝까지 충만한 하루를 보내는 것. 시간을 메워 뭐든지 해내는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기 보단, 내 나름의 균형 안에 충만한 새로움을 얻을 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균형점 만큼 채워넣는 것.



어쩌면 이 여행의 작은 시간조각들을 모아 실 하나에 꿰면 그런 풍경이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는 해가 비치는 강가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마지막 석양을 만난다. 하지만 슬프기보단, 충만히 기쁘다. 더없이 내 최선대로 행복한 3주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순간에도, 의미는 있돼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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