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9] 왜 하필 스위스야?


“근데 왜 하필 스위스야?"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물론 여행하기 좋은 국가란 건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오랜 시간을 ‘스위스에서’ 보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두 궁금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어렴풋이 이 결정을 내릴 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조용한 오솔길, 붐비지 않는 골목길, 아름다운 호숫가를 걷는 시간이라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알프스의 고요한 산길과 너른 능선, 호숫가에 비친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골목골목 옛 정취와 새로운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거리까지… 내 마음 속 스위스는 호젓하게 거닐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산이 있었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도 그 자리에 있는 산. 만년설을 품고 있기도, 푸른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색에 내어주기도 하는 산. 그 산들 품에 안겨 어쩌면 내내 어린아이처럼 경탄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근원적인 탄식이 주는, 살아갈 힘.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묘한 위로와 함께, 자연 혹은 절대자의 품에 안겨, 이 생의 외로움과 괴로움 따위는 잠시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산중의 산이요 여왕의 산이라 불리는 리기산에 올랐다. ‘스위스의 산’이라고 떠올릴 수 있는 목가적이고 따듯하면서도 동시에 웅장한 풍경. 그 모든 풍경을 한 군데서 볼 수 있는 멋진 산. 분명 리기로 향하는 길에는 이런 설렘과 기대감만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한가지 놓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 여행객 뿐 아니라 현지인들까지 가득 찬 기차에 꾸역꾸역 타자 마음의 평화 대신 지옥철에서 느끼던 답답함의 기시감이 밀려왔다. 숨이 막힐 듯 밀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어떤 기차보다 가파르게 사람들을 밀어올리는 기차, 그리고 그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로 쏠리는 모두의 무게까지…



30분의 시간이었지만,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지옥열차’를 타고 리기산의 정상에 오르고 나니, 내 마음속에선 경탄보단 안도의 탄식이 먼저 흘러나왔다. 휴, 살았구나.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풍경을 눈에 넣어보려 했다. 늘 꿈에서 보던 저 멀리의 호수와, 눈앞의 능선과,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만개한 민들레…. 하지만 어쩐지 이 모든 것들에 집중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풍경 자체로는 ‘완벽’했으나, 내 마음이 이미 그 완벽한 합을 안에 들이지 못할 만큼 좁아져 버린 탓일까. 한껏 예민해진 나는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풍경을 흘려보내며 리기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한참 후, 갈래길에서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길을 찾았다. 덕분에 고요히 너른 능선을 타고 넘으며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시야와, 넓은 구릉과, 저 멀리까지 햇살을 부수며 나아가는 소들의 워낭소리…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난 듯, 그제야 나는 모든 시간 안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풍경을 수없이 스쳐와도 느낄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이 열린 이제야 조금씩 마음에 금이 가는 기분.


덕분에 한창 즐겁게 하이킹을 했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향하는 길, 내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 충분하다“


몸과 마음의 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보는 방법을, 삶이 어지럽고 힘겨울 때 나의 중심 속에 고요를 되찾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산을 오르고 풍경을 바라보는 모든 시간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그 충만한 느낌. 참으로 오랜만에 무언가에 깊이 빠졌다가 충분히 해내고 나온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최선을 다한 사랑에 후회가 없듯, 최선을 다해 여행한 이 모든 시간이 이제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달까.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일 예정되어 있던 산행을 취소하고 나는 오는 길에 들르고 싶었던 마을의 이름을 찾아 기차 시간표를 검색해본다. 내일은 자연이 내게 준 평화와 고요를 안고, 뚜벅뚜벅 사람들 사이를 걸어나가 봐야지. 얼마남지 않은 시간, 내 뜻대로 이 고요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 잘 지내고 싶다. 충분히 행복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며.



이전 19화 [순간의, 스위스 #18] 루체른의 너른 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