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스위스 #19] 왜 하필 스위스야?

by 람곰


“근데 왜 하필 스위스야?"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물론 여행하기 좋은 국가란 건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오랜 시간을 ‘스위스에서’ 보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두 궁금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모르겠다. 어렴풋이 이 결정을 내릴 때를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조용한 오솔길, 붐비지 않는 골목길, 아름다운 호숫가를 걷는 시간이라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알프스의 고요한 산길과 너른 능선, 호숫가에 비친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골목골목 옛 정취와 새로운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거리까지… 내 마음 속 스위스는 호젓하게 거닐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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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중심엔 산이 있었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도 그 자리에 있는 산. 만년설을 품고 있기도, 푸른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색에 내어주기도 하는 산. 그 산들 품에 안겨 어쩌면 내내 어린아이처럼 경탄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근원적인 탄식이 주는, 살아갈 힘.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묘한 위로와 함께, 자연 혹은 절대자의 품에 안겨, 이 생의 외로움과 괴로움 따위는 잠시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산중의 산이요 여왕의 산이라 불리는 리기산에 올랐다. ‘스위스의 산’이라고 떠올릴 수 있는 목가적이고 따듯하면서도 동시에 웅장한 풍경. 그 모든 풍경을 한 군데서 볼 수 있는 멋진 산. 분명 리기로 향하는 길에는 이런 설렘과 기대감만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한가지 놓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 여행객 뿐 아니라 현지인들까지 가득 찬 기차에 꾸역꾸역 타자 마음의 평화 대신 지옥철에서 느끼던 답답함의 기시감이 밀려왔다. 숨이 막힐 듯 밀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어떤 기차보다 가파르게 사람들을 밀어올리는 기차, 그리고 그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로 쏠리는 모두의 무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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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의 시간이었지만,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지옥열차’를 타고 리기산의 정상에 오르고 나니, 내 마음속에선 경탄보단 안도의 탄식이 먼저 흘러나왔다. 휴, 살았구나.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풍경을 눈에 넣어보려 했다. 늘 꿈에서 보던 저 멀리의 호수와, 눈앞의 능선과,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만개한 민들레…. 하지만 어쩐지 이 모든 것들에 집중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풍경 자체로는 ‘완벽’했으나, 내 마음이 이미 그 완벽한 합을 안에 들이지 못할 만큼 좁아져 버린 탓일까. 한껏 예민해진 나는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풍경을 흘려보내며 리기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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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 후, 갈래길에서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길을 찾았다. 덕분에 고요히 너른 능선을 타고 넘으며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시야와, 넓은 구릉과, 저 멀리까지 햇살을 부수며 나아가는 소들의 워낭소리…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을 만난 듯, 그제야 나는 모든 시간 안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같은 풍경을 수없이 스쳐와도 느낄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이 열린 이제야 조금씩 마음에 금이 가는 기분.


덕분에 한창 즐겁게 하이킹을 했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향하는 길, 내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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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충분하다“


몸과 마음의 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보는 방법을, 삶이 어지럽고 힘겨울 때 나의 중심 속에 고요를 되찾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산을 오르고 풍경을 바라보는 모든 시간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그 충만한 느낌. 참으로 오랜만에 무언가에 깊이 빠졌다가 충분히 해내고 나온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최선을 다한 사랑에 후회가 없듯, 최선을 다해 여행한 이 모든 시간이 이제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달까.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일 예정되어 있던 산행을 취소하고 나는 오는 길에 들르고 싶었던 마을의 이름을 찾아 기차 시간표를 검색해본다. 내일은 자연이 내게 준 평화와 고요를 안고, 뚜벅뚜벅 사람들 사이를 걸어나가 봐야지. 얼마남지 않은 시간, 내 뜻대로 이 고요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 잘 지내고 싶다. 충분히 행복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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