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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5] 비오는 날의 트레킹



[나는 아직 쉬는법을 몰라]


쉬고싶다며 널널한 일정을 짜고선 이 곳 체르마트, 그 중에서도 시내와 한참 떨어진 산속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직 쉬는 법을 모르는 나는, 여행의 하루를 그냥 보내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빗속을 뚫고 하이킹에 나선다. 원래 체르마트 일정 중 하루는 ‘여유‘로 두기 위해 비워두었는데, 그런 일이 무색하게 마치 ‘새로운 도전’을 하듯 작은 마을들 사이를 하이킹하는 일정을 세운 것이다. 이런걸 무모한데 성실한 바보라 해야 할까.



처음 출발만해도 기세등등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을 걸으면서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방향을 돌고 돌아 찾아냈다. 그런 스스로가 괜히 기특했고, 허세가득하게 핸드폰엔 ‘이렇게 외로운데 외롭지 않은 기분을 느끼는 게 꼭 인생같다’고 메모해가며 길을 이어갔다. 그러나 웬걸, 가도 가도 길은 멀고, 새로 입은 옷에는 흙탕물 가득, 신발에 양발에 점점 물은 차고… 40분이면 도착 할 수 있다는 거리를 한시간 반 넘게 걸려 도착하면서, 내 마음엔 조급함과 불편함만 한가득 남아있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해내려 했을까.


비맞은 생쥐꼴을 하고 기차역에 내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비가 그치고 맑은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안그래도 지치고 배고픈 데 비까지 쫄딱 맞아버린 내게 갑자기 나타난 해는 마치 날 놀리기 위해 뜬 것 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세상에, 오랜만에 이렇게 엄청난 현타를 맞아버리다니. 실패해도 괜찮아, 라고 스스로 위로하다 그 위로조차도 너무 허술하고 쓸모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래도 그 웃음 덕분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 숙소에 도착해냈다.



숙소에 도착해 얼른 씻고 밥을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찰라, 내 머릿속에선 어차피 해 좋은 시간 들어온김에 빨리 옷도 빨고 신발에 흙도 정리해야지 라는 정언명령이 떠올랐다. 세상에 그렇게 죽겠다 죽겠다 하고 방에 들어와놓고는 빨래 담가놓고 신발 정리하고 젖은 물건 분리해 널어두고…. 한참을 그렇게 분주하게 일하다 보니 갑자기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배도 고프고 힘들고 피곤한데 계속 뭘 하고 있으니 몸에서 파업 선언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모든 걸 다 정리해두고 침대에 누워 이 글을 쓰면서, 정말 나도 참 나구나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런 ‘분주한 마음’을 좀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2023년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아무에게도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웠는데, 절반 즈음을 지나가는 지금 새로이 목표를 세워봐야겠다.

‘제대로 쉬고, 차근히 해내는 법을 배우자’



어른대는 해를 바라보며 가만히 창가의 욕조에 물을 데운다. 이제서야 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과 나를 향해 끝없이 울어대던 바람의 소리에 눈과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나. 나를 위해서 좀 더 많은 것들을 허용해주어야겠다 다짐했다. 특히나, 내 안의 평화를 깨울 수 있는 잔잔한 고요의 시간들을.


하루가 잘 간다. 아쉽지만, 잘 보내려 노력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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