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일에 발급받은 첫 여권은 작년 4월 1일부로 만료되었다. 무쓸모 한 여권은 서랍 한 구석에 고이 잠들었는데 오랜만에 그 친구를 깨워 지난 10년의 여행과 출장 이야기를 나눴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2017년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이 찍힌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출장을 가고 싶어질 줄이야
코로나가 창궐하며 하늘길이 막히면서 출장 가는 이들마저 부러워졌다. 얼마 전 우리 팀에서 3명이 이라크 현장으로 파견을 갔는데 (가서 고생은 하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간다는 그 자체로 그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스물여덟 생일날, 대리 2년차였던 나는 팀에서 단독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생일날 마일리지를 선물로 받으며 간 출장의 참석자는 이랬다. 쿠웨이트 석유 회사에서 온 울트라슈퍼 '갑' 사업주 엔지니어, 사업주를 돕는 중간대리인 격의 '을'인 PMC 엔지니어(Project Management Consultant 사) 그리고 건설사에서 설계하는 '병'의 위치에 있는 엔지니어인 나. 내 입장으로서는 환상적인 핵노잼 조합이었다. 참석자 모두 영어가 모국어는 아닌 엔지니어들이었고 회의실은 바디 랭귀지로 댄스 배틀이 벌어지는 후끈한 소통의 장이었다.
회사가 나에게 허리 위로 산더미 같은 봇짐을 딱 메어주고는 '가서 실수 없이 잘 전해다오.' 라며 부담을 주지는 않았지만 '회사인간'에게 주어지는 특명이은근하게따라붙었다.
여행에서는 사진, 영상, 글 등 원하는 모양의 조각들로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내 마음이요, 안 남겨도 그만인데, 출장에서는 회사의 아바타가 되어 보고봇이 된다. 한번은 출장 보고를 안 했다가 이렇게 까지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혼난 적도 있다. 그 이후로는 일일보고는 물론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중간에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보고를 했다. 상무님이 나에게만 보낸 메일에 회신해 상세 보고를 하고, 상무님께 보고했다는 사실을 팀장님에게 보고하며(?) 내가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는 중이라는 것을 있는 힘껏 보여준다.
여행이라 생각하면 보이는 것들
'그나저나, 내 생일인데. 이렇게 보낼 순 없어.'
출장 중 찰나의 즐거움을 억지로 주워 담고 즐거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주문을 외운다.
캐리어를 끌고 정갈한 호텔방에 들어서는 첫 발, 로컬들만 아는 맛집에 가서 즐기는 샹그리아와 빠에야, 귀에 꽂히지 않는 외계어이지만 타지에 온 것을 실감케 하는 에스파냐어, 정수리에 계란을 깨서 올리면 후라이로 만들어 줄 지중해 태양. 그래, 김 대리. 너는 출장을 온 게 아니야. 다만 여행 중에 일을 하는 것일 뿐.
여행에 온 것이라고세뇌시키다 보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로다.
마드리드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네이마르(바르셀로나 선수)의 골 소식을 듣고 택시기사 아저씨가 환호하는 진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 동료직원들에게 종종 풀어낼 썰이 된 사건이었다. (부연설명: 한국이랑 일본이 축구를 했는데 일본이 골을 넣었을 때 한국인이 좋아하는 상황과 같음)
Del Olive, 2017년 당시 트립 어드바이저 1위였던 레스토랑
그런가 하면 우연히 가 본 식당이 알고 보니 트립 어드바이저 1위 맛집이기도 했고, 산 미구엘 시장에서 알게 된 스페인어 1,2,3,4를 '우노, 도스, 트레스, 콰트로'라며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을 구부리며 세기도 했다.
'그래! 이건 분명 여행이야.'
일요일 밤에 도착해서 시차 적응도 안된 채 월화수목금 일정을 소화하고 금요일 오후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공항으로 가야 하는 미친 출장스케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와중에 회의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약속에 없던 주말이 끼게 되는데, 그때가 그랬다.
그야말로 '유야호!!!'라고 속으로 외쳤다.
마드리드 솔 광장
"나는야 정열의 도시, 마드리드의 여행자! 여기서 살 수 있는 마그넷과 스타벅스 시티컵을 쓸어 담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관광지들만 골라 다닐테다!"
손미나 언니로 빙의된 나는 주말 내내 그 다음주 화요일의 기력까지 끌어다 쓰며 하루에 족히 2만보 이상은 걸었다.
산 미구엘 마켓
'영감은 낯선 곳으로부터'라는 자동차 광고 카피처럼 낯선 곳에 간다면, 그리하여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건 필시 여행이라 생각한다. 일상 중에서 낯선 북카페에 가서 잘 안 마시던 따뜻한 바닐라 라테를 마실 때, 여행이라 느껴지는 것은 낯선 감각을 깨웠기 때문이리라.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여행과 출장은 어찌 보면 한 형제 같지만, 아무래도 공적인 것은 출장, 사적인 것은 여행으로 무 자르듯 반듯하게 갈라진다. 출장이 직선으로 그린 도형이라면 여행은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린 도형일 테다. 출장의 직선을 마구 각을 이루어 긋다 보면 여행의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을까.
여행과 출장, 여전히 혼란한 틈에 이 질문으로 선을 그어본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달라진다면 여행일까? 출장일까?
2017년 뜨거웠던 스페인으로, 나는 사실 출장인 척 여행을 떠났노라고 고백해 본다.
내일, 위즈덤 작가님은 '생각'과 '마음'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