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o Aug 31. 2017

항상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이유

선택을 잘할 수 있는 방법

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선택'이다.

쉬운 선택도 있으며, 어려운 선택도 있다.

선택을 함으로 인해 큰 것을 잃는 때의 선택이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큰 얻음 또한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함축한 전문 용어로는 'trade off' 또는 '기회비용'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선택은 최소의 손실로 큰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러한 선택의 순간들이 매 순간 존재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남은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만큼 선택은 중요하다.


이러한 선택은 단지 선택지가 생겨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이유로는 우리의 자아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인가 생각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두 가지의 입장 속에서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또 다른 자아의 속삭임에 의해 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경우가 발생할 때는 당연스레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했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과연 그럴까?


20세기 중엽, 뇌전증(뇌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전기 폭풍이 다른 부분들로 빠르게 퍼져 급성 발작을 일으키는 뇌 질병)에 대한 다른 모든 치료가 실패하자 의자들은 두 대뇌반구를 연결하는 두꺼운 신경다발을 끊어 한 대뇌반구에서 시작된 전기 폭풍이 다른 대뇌반구로 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증상을 완화시켰다.

이런 대뇌반구를 끊긴 환자들에 대한 연구들 가운데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로저 울코트 스페리 교슈와 그의 제자 마이클 S. 가자니가의 연구들이 특히 주목할만하다. 그중 하나는 한 10대 소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우선 그 소년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는데, 소년은 데생 화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논리적 추론과 말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좌뇌가 제시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말하기 중추가 소년의 우뇌에 있었고, 그 부위는 음성언어를 제어하지는 못하지만 알파벳 철자가 적힌 조각들을 이용해 단어를 말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소년의 우뇌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책상 위에 글자 만들기 게임 조각들을 펼쳐놓고, 종이 한 장에 이렇게 썼다. '커서 무엇을 하고 싶니?' 그들은 소년의 왼쪽 시야 끝에 그 종이를 놓았다. 왼쪽 시야에서 오는 데이터는 우뇌가 처리한다. 우뇌는 음성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왼손이 책상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더니 여기저기서 철자 조각들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다. '자동차 경주.' 섬뜩한 결과이다.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Gimm-Young Publishers Inc, 2017, 401page 


좌뇌와 우뇌를 서로 인지하지 못하게 한 후에 대한 반응을 테스트를 한 것이다. 우뇌가 인지 못할 때에 좌뇌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어떤 소년에게 물어봤을 때와 좌뇌가 인지하지 못할 때 우뇌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각자 다른 대답을 하였다. 결과를 얘기하자면 좌뇌와 우뇌에게는 각자 다른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두 개의 자아라고 말을 한다면 다들 다중인격이라는 정신병을 떠오를 것이다.

다중인격이 아닌 실제로 우리 안에는 최소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인지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관장하는 자아 중에는 항상 지금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변명을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끔씩은 자신도 놀라게끔 하는 자신의 자아를 발견할 때가 있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변명을 하는 자아가 설득력이 없는 변명을 한 결과일 수 도 있다.


나는 오롯이 하나의 자아로써 생각한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항상 내 안에서는 갈등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나만의 허황된 생각과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접한 후부터는 자아가 최소 두 개 이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다중인격은 어쩌면 정신병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변명을 하는 자아가 없어서 일 수도 있다. 변명을 하는 자아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현혹시킨다. 이러한 면을 생각해보면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은 우리보다도 현실만을 더욱 직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기엔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 때에는 능률이 반감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다른 자아가 도와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능동적으로 하게 될 때 그 성과와 효율은 배가 넘는다.


가끔씩 어려운 선택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

우리를 지배하는 자아가 모두 원하는 것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가령 게임이라면 그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단지 좋아해서만일까? 아니면 방해하는 다른 자아가 없어서 일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불법적이고 비 인륜적일 수도 있는데 따라야만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럴 때는 강하게 반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어쩌면 이를 방치해서 일수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는 매사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러한 순간들은 내적 자아들의 각기 다른 의견차로 인해 발생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보다 좋은 결과와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때의 결과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방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타트업, 시간과의 싸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