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하게 영화 읽기 no. 004] 반교를 보고
0.
밤 중에 학교에서 깨어난 팡루이신. 학교 안을 헤매다 웨이충팅을 만나 함께 학교를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학교 앞 길이 끊어져 있어 다시 학교로 돌아온 둘. 그들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고 학교를 빠져나가라고 하는데. 둘은 학교를 탈출할 수 있을까? 처음엔 (흔하디 흔한) 태국 공포영화인 줄 알고 안 보려고 했다. 영진위 쿠폰도 쓸 겸 여러 영화 후기들을 보다가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후기에 반교 영화 정보를 들여다보게 됐다. 대만 영화, 게임의 영화화, (이런저런 검색을 타고 들어가 알게 된) 백색 테러.
1.
반교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니다, 공포영화다. 인간의 세계가 환영의 세계보다 더욱 끔찍한 걸 보여준다. 귀신이 나오거나 누가 누굴 죽이거나 심장 조여들게 숨고 숨거나 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공포와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열망이 어떻게 부딪치고 어긋나며 실존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회문제를 영화화한 것을 단순히 좋아하거나 의미 있다고 높이 사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소재일수록 제대로 못할 거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암시, 은유, 꿈과 환상이 현실의 조각들과 어우러져 연출되는 것을 선호한다.
<반교>는 이런 내 선호와 매우 일치한다. 시대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그 시대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인간적인 욕망과 어긋난 분노, 오해, 연민과 이해, 반짝였던 순간을 이들을 뒤엎어버리는 공포, 혼란, 환상과 고통으로 지그재그 배열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도 좋고, 감정선을 따라가도 좋고, 분위기를 느껴도 좋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한 번쯤 그 상황에 나를 대입해봐도 좋을 것 같다.
2.
처음엔 이 모든 비극이 사랑과 오해의 산물인 것인가란 오해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보편적 감정을 이용할 수 있고, 그것이 이용되기도 하며, 싫어하는 사람을 고발하고 묻어버리고 내가 이겨버릴 수 있게 악용되는 시대가 실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정도의 결과는 생기지 않았으리란 것을 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열망하며 새로운 땅으로 향했던 이들이나, 그들의 이주로 인해 자신들의 뜻과 다를지도 모를 정치사회문화를 이식하게 된 이들에게 해당 권력의 공포정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자신의 선택이 맞았는지조차 의심하게 할 수 있다. 또한 그 권력은 자신을 패배시킨 권력보다 하등 나은 게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열망한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읽고 쓰고 나누고 알린다. 그것이 비록 나를 죽음으로 이끌지라도.
때로 살아남은 자에 대한 오해나 핍박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로서 짊어져야 했던 무게는 차마 상상하지도 못한 체 배신자라고 낙인찍거나 패자로 취급하기도 했다. 홀로 남은 웨이충팅은 그런 삶의 시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만 같다. 오랜 시간 다시 찾지 못한 학교를 찾은 그는 (게임의 결말은 모르겠지만) 사라진 이들을 다시 아름답게 보내준다. 그 시절 만나지 못했던 자유에게, 자유의 시대에서.
3.
사족 1.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대만영화를 보면서도 계엄령 시기라는 것은 반교를 통해 처음 접했다. 중국-대만-원주민들 사이 복잡한 이해관계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 같은 저 시대, 독서회 모임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화를 보면서 암울한 독재시대 자유를 외쳤던 한국의 역사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사족 2. 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저것은 npc인가? 게임하면 더 무섭겠군, 게임해봐야겠군’이란 생각을 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