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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Sep 07. 2020

한때 나를 갉아먹은 기억 떠올린 후에

결국은 내가 나로 서야 하는 것

학창 시절 서로가 함께 했던 시간만큼 각자의 모습이 진짜인지와 무관하게 서로에게 각인된 모습들이 있다. 그 범위를 넘어서면 ‘달라졌어, 변했어’와 같은 말을 듣게 되는. 나는 그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 뭘까 고민하고, 기분을 맞출 말을 먼저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얘는 원래 이래’ 따위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너희들이 아는 나와 내가 만들고 싶은 나 혹은 진짜 나는 다른 모습이야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외쳤지만 늘 같은 수업, 같은 친구,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 진짜 나를 찾거나 드러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관계에 결국 균열이 왔을 때 봉합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그냥 그렇게 다 깨어져버리고 홀로 남는 걸 선택한 건.


Photo by Noah Silliman on Unsplash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곧잘 주위를 둘러보고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게 취미지만 누가 뭐라든 좋은 말은 알아서 챙기고, 나쁜 말은 그러든가 말든가로 흘려보내게 된 건. 딱히 관심 없는 이에게도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거나 친구(라고 일컬었던 이)들이 뭐라고 수군거릴지 걱정하며 머리를 하고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머리를 하게 된 건. 뭐 먹을래, 어디 갈래를 서로에게 몇 번씩 물으며 타협안 혹은 누군가의 선호 안을 더 따라가던 때를 벗어나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내가 가고 싶은 카페에서 멍 때리는 등 ‘혼자’하는 행위들을 해나갔고, 혼자임에도 아무렇지 않아 지는 시간을 쌓아갔다.


물론 그 순간들에도 새로운 관계는 맺어졌고 지켜져 온 것들도 있었다. 학창 시절 필사적으로 매달린 무리가 아님에도 나에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비록 1년에 한두 번 보는 친구라도 그 시간의 틈을 느끼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고 응원을 보내며 시간의 틈을 매울 수 있는 관계도 있었다. 새롭게 맺어진 관계가 결국 파국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고, 여전히 나는 그 이유를 모르는 관계의 종말도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 혹은 십 대라는 시간을 벗어났기 때문인지 그때와는 다른 노력과 소통의 관계 맺음이 필요했고 각자의 시공간이 더 넓어지는 만큼 느슨하게도 유지되는 관계도 있었다.


Photo by Shane Rounce on Unsplash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관계의 불가피성을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관계는 서로 용기를 주고 지지를 보내고 따뜻함을 나누기도 하지만, 때로 사람을 좀먹고 낙인을 찍고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 나 혼자만 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서 지쳐버리거나, 혼자되고 싶지 않아 무의미한 관계망만 계속 키워가거나, 관계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도태시키거나 배척하는 건 오롯이 지킬 수 있는 나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스스로 진지하게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나의 가치관 혹은 인생관 위에 쌓아가고 싶은 성장, 성취, 관계 등을 정립하지 않는다면 내가 곧 성장의 노예, 관계의 노예로 전복되어버릴 것이다. 잘못된 일을 시작하거나 관계를 형성해놓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끌고 가면서 지치고 욕하고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경험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유일하게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자존감을 되찾고 건강한 성장과 관계를 해나갈 용기와 의지, 방향을 만드는 방법으로 혼자되기가 필수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쯤은 홀로서기라는 말에 꽂힌 때가 있었고, 지하 땅굴을 파고 들어가 홀로 있고 싶었고, 아무도 날 알지 못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지 않았나? 내가 나와 마주하고 싶은 순간은 수험생 시절이나 취준생 시절이나 회사에서 번아웃이 올 때나 관계에 피로해질 때 등 언제고 때때로 찾아든다.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순간들을 건강하게 이겨내기가 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내 기억 속 아이는 관계 속에서 두려움을 배웠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물고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번번이 관계에 짓밟히고  모든 걸 자신의 문제로 환원하며 더욱 세상의 눈치를 보거나 세상의 뒤로 숨었다. 견딜 수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홀로 당당해질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친구가 없으면 세상이 끝난 줄 알았던 청소년기가 지나서인지 아니면 내가 나 혼자 하는 무언가에 익숙해져서인지 친구 혹은 관계는 더 이상 불가결한 것들이 아니게 되었다. 다만 혼자일 때 느끼는 충만함들이 새로운 일을 하거나 관계를 해나갈 에너지로 이어졌고, 혼자서도 잘하는 무언가가 생기며 서로의 역학에 예속되지 않는 관계가 맺어졌다. 혼자를 잘 누리면서 함께를 잘 즐기는데도 여유가 생기고 있달까.


Photo by Wil Stewart on Unsplash


여전히 주위에는 나도 다 모르는 나를 안다고 떠들어대며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더 이상 그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똑바로 선 나에게는 더 좋은 관계들이 만들어졌고, 또한 더 좋은 관계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만큼 알 수 없는 관계들도 많아지고 얽히겠지만 그 역시 잘 풀어나갈 체력을 길렀다.


가끔씩 발목을 잡거나 좀 먹었던 과거의 기억들은 이제는 그때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정도로 남아있다. 그때 미리 알았다면, 그래서 이렇게 살았다면 지금은 또 다르게 살았으려나  언젠가 다시 어두운 곳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면 두려워말고 스스로를 믿고 옳은 말과 선택을 해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럼 가슴이 텅 비어버릴 것처럼 스쳐가는 패잔병과 같은 기억을 시간 저편으로 던져버릴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난 그런 시간 속에 살아왔고 버텨왔고 또 이겨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내게 해줘야 할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잘 이겨내고 있어라는 말일 것도 같다. 그러니까 걱정 말라는 말. 인간의 기대수명에 의하면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 그 시간 속에서 또 몇 번씩이나 흔들리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깨어질지 모른다. 그 순간들마다 나는 다시금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잘 설 수 있게 하는 법,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또 사랑을 할 때 나와 나의 소중한 이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아닐까.


언젠가부터 그저 제목에 혹은 내용에, 필요성에 이끌려 구매했던 나 그리고 우리를 위한 책들


이 글을 쓰던 중 보게 된 이다혜 기자님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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