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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미 Oct 20. 2023

겉으론 웃어도 속으로 울었던 20대 홈쇼핑 적응기

그토록 바랐던 일인데 행복하지 않았던,


홈쇼핑은 보통 두 사람이 출연한다. 특집 방송이나 연예인이 나와서 세명인 경우를 제외하곤 보통 왼쪽에 있는 사람을 메인 쇼호스트라 부르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서브 쇼호스트라 부른다. 당연히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메인 쇼호스트가 방송을 주도하고, 대부분 그 홈사의 쇼호스트 두 명이 메인과 서브로 나뉘어 방송을 이끌어가는데 가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쇼호스트가 아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 사람을 '게스트'라 부른다.






말 그대로 주인과 손님인 것이다. 홈쇼핑 회사의 소속인 '쇼호스트'가 아니라, 판매하는 물건의 회사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정말로 회사를 대표해서 그 상품을 개발한 연구원이나 회사 대표님이 나오는 경우도 예전엔 가끔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본래 방송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 아무래도 방송의 완성도 면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에(홈쇼핑은 생방송이므로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정규직, 비정규직 혹은 프리랜서라는 다양한 방법으로 게스트를 운용하곤 했다.






25살의 나는 A 화장품 회사의 홈쇼핑 영업팀 정규직 게스트로 활동했다.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에 출근했던 날, 날 안쓰러워하셨던 감독님의 원샷 선물(?)




내가 일했던 회사는 우리가 흔히 바르는 스킨, 로션부터 쿠션 류의 메이크업 제품, 치약, 염색약, 샴푸, 다이어트 제품까지 정말 많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의 이름을 달고 한 달에 수십 개가 넘는 방송을 정직원이라는 책임감으로 무장해 방송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었기에 말이다. 











홈쇼핑은 24시간 중에 20시간이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아침 6시 첫방부터 새벽 2시 막방까지.


출연자 기준으로 홈쇼핑 방송은 대부분 이런 흐름을 갖고 있다. 새벽 6시 첫 방송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늦어도 4시 30분에 출근해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홈쇼핑엔 메이크업과 헤어팀이 따로 있다.), 방송 한 시간 전인 새벽 5시에 사전 미팅을 갖는다. 이미 일주일 전쯤 PD와 MD, 쇼호스트와 업체 관계자가 모여 그 방송의 콘셉트, 혜택과 구성 등을 조율하고 맞춰봤지만 당일 생방송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면 안 되기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서로 확인하는 과정을 갖는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바쁘게 의상실로 가서 그날의 콘셉트에 맞는 (PD님이 정해놓으신) 의상을 입고 액세서리를 하고 채비를 해서 스튜디오로 가면 생방송 30분 전쯤.







뜨거운 조명을 상쇄하기 위한 찬 에어컨 바람이 몸을 에우는 스튜디오. (전날, 밤늦게 방송을 한 날이면 유난히 그 에어컨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그 안에 들어가면 카메라 감독님, 세트장 그 외 스태프 분들까지 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있다. 1시간 남짓되는 방송의 목표는 보통 수 억. 특집 방송이나 프라임타임이라고 주말 저녁이나 9시 뉴스가 끝나는 시간 등의 메인 시간대는 그 당시 목표가 분당 3천만 원 이상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수 천만 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각자의 맡은 역할을 해낸다.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은 역시나 카메라 앞에서 고객과 바로 맞이하는 쇼호스트와 게스트.








이 책임감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홈쇼핑을 선택한 것은 '좋은 제품을 좋은 가격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내가 근무했던 화장품 회사는 많은 상품군을 가진 회사답게 당시 홈쇼핑 5개사 모두와 방송을 했다. 하루에도 A사, B사, C사의 방송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동서남북 흩어져있는 각 회사에 가기 위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열심히 달렸다. 이렇게 체력적으로 부담되는 건 내 몫이라 생각하고 좋아하는 방송을 하니 참을 수 있었지만, 심지어 같은 제품을 같은 날 각각 다른 회사에서 다른 구성으로 방송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내 죄책감이 점점 커졌더랬다.








홈쇼핑은 심의가 엄격하지만 그만큼 벗어날 구멍이 있기도 하다. 내가 느끼기에 그걸 얼마나 잘하느냐가 그 당시 잘하는 게스트였다.(나는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성 마지막!', '이 혜택, 이 조건 마지막!'이라는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한 번 이렇게 말을 내뱉으면 정말로 다시는 홈쇼핑에서 같은 구성과 혜택, 조건으로 방송할 수 없으니까.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말. (여담이지만 재고 털이를 하느라 영원히 마지막이라는 타이틀로 사은품을 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직원분의 실수로 재고가 너무 남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확실하게 영원히! 마지막이라 외친 탓에 홈쇼핑에서 다시는 사은품으로 내놓을 수 없었고 남은 물건들의 처리를 위해 담당자분이 꽤 고생을 하신 일이 있었다.)






구성, 혜택, 조건. 홈쇼핑을 볼 때에 앞으로 주의 깊게 본다면 왜 내가 예전에 소비자들에게 미안함을 가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화장품 방송 위주로 설명해 보면, '구성'은 말 그대로 그날 판매하는 제품들의 나열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스킨, 로션, 에센스 등등 10개 정도의 화장품 세트 중에서 크림 하나만 빼도 구성이 달라진다. 이 구성 마지막이라 외쳤다면, 다음 방송에서는 다른 크림을 넣으면 된다. 그 크림도 심지어 "판촉"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는 볼 수 없는 제품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좋은 기술력으로 좋은 성분으로 만든 제품이겠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이 혹할만한 성분을 한 두 가지 넣거나, 시즌별 유행하는 성분을 넣고 그 이름을 붙여서 새로운 크림을 손쉽게 만들어낸다. (물론 성분 한두개를 넣음과 동시에 케이스를 갈아치우기도 한다.)






너무 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혜택과 조건 변경에 비하면 구성은 양반이다.  


혜택과 조건은 '무이자 할부 개월 수' 혹은 '카드 할인', '앱 적립금' 등등. 더 작은 차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이런 조건을 바꾸는 것이 담당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걸 알지만, 40% 가까이 수수료를 받는 홈쇼핑사에서 이건 너무 말장난이 아닌 건가라고 매번 생각했다.








내 기준에 좋지 않은 구성으로,
좋지 않은 혜택과 조건으로 방송하는 날은
그 시간 내내 괴로웠다.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은 예전처럼 그렇게 한 달에 수십 개 같은 상품을 방송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다양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근무했을 땐 질보다 양. 그냥 방송 횟수를 늘려서 그 달의 매출 목표를 채웠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내가 매출압박이 크던 시기에 일했기에 더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그 시간이 많이 미안했다. 시청자들에게. 특히 내 친구 어머님들이나 엄마 친구분들이 TV에 나오는 내 얼굴이 반가운 마음에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더더욱. 








물론 좋은 상품을 좋은 구성으로 방송하는 날은 행복했다. 재밌었고 신이 났다. 하지만 나는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었고, 홈쇼핑 영업팀에서 방송만 하는 사람이었지 이런 결정하는 권리는 없었으니까. 지나고 보면 20대 중반의 방송이 하고 싶은 어린 나는 방송하는 기계였던 것 같다. 그때가 좋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과거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매일 다래끼와 입술 헤르페스를 달고 살았고, 50kg을 넘지 못했다. 불규칙한 생활로 잘 챙겨 먹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카메라 앞에 서다 보니 항상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선후배가 엄격한 방송일 특성상 선배 대신 해야 하는 일이 많은 경우도 나를 지치게 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게스트로 일하면서 공채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항상 좋지 못했다. 바로 옆자리 저렇게 가까운 곳은 '쇼호스트' 자리인데, 여긴 '게스트' 자리라는 것이 참 힘들었다. 분명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이라 생각했는데 점점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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