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미 Nov 02. 2023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만큼

이직의 시작은 교통사고로부터


홈쇼핑에서 승무원으로 이직을 하게 된 건 정말 즉흥적이었다. 홈쇼핑만을 외치며 다양한 일을 해오던 내가 갑자기 승무원이 되었다 하니 다들 그 이유를 궁금해했고, 교통사고 때문이라 말하면 모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긴 명절 연휴만 지나면 그토록 기다리던 휴가였다. 홈쇼핑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니 이번 휴가엔 반드시 혼자 휴가를 떠나리라 다짐했었다. 명절 내내 쉬지 못하고 특집방송을 하며, 선배들의 방송도 대신해 가며 휴가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방콕으로 출발하기 바로 전 날,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외근이 많은 업무 특성상 그날도 회사 직원분과 같이 방송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었다. 서부간선도로 위, 바로 뒤에 있던 택시기사가 무엇에 홀린 듯 우리 차를 박았다. 나는 운전자가 아닌 동승자였고, 어디 부러지거나 피가 나거나 한 사고는 아니었지만 얼굴을 천장에 부딪치고 들고 있던 핸드폰이 떨어지며 부서졌던… 일주일 넘게 입원한 사고였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입원 확인서를 내면 출국 전날이라도 아무 수수료 없이 비행기와 호텔을 취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이렇게 일주일 넘게 쉬는 모습을 그동안 꿈꾸며 상상했었는데, 몸이 아파 누워있는 건 말 그대로 진짜 쉬는 게 아니라 그냥 아픈 거였다. 게다가 회사로부터 일주일 입원 후 퇴원하면 바로 또 방송과 미팅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친 건 다친 거고, 내가 빠지면 다른 팀원들이 힘드니 다리 다친 거 아니고 걸어 다닐 수 있으면 방송하라고. 얼굴에 멍도 메이크업을 받으면 잘 보이지 않으니 사고 난 지 10일 째부터는 방송 스케줄을 잡겠단 얘기를 들었다. 끙끙 앓으며 정신도 못 차리는 와중에 마음이 내 열정이 식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세 시, 온몸이 욱신거리에 아픈 탓에 새벽에 깨서 진통제를 더 달라고 간호사분께 말씀드리는 통에 잠이 깨 버렸다. 큰 병원답게 새벽에도 밖은 밝고 부산스럽기도 했고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된 이상 취소한 비행기 표나 다시 사보자는 생각에 “ㅇㅇ항공”을 검색했다. 연관 검색어에 ‘승무원 채용’이 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홈페이지에 들어가 채용 관련 정보를 읽었다. 운 좋게도 얼마 전부터 키 제한은 폐지됐고(당시 나는 162cm가 채 안 됐다), 나이 제한도 없고(그 때 나는 27살이었다), 토익점수만 있으면 되는데 550점만 넘으면 된다고 하니 해볼 만하다 싶었다. 대학교 졸업을 위해 땄던 토익 점수는 800점이 넘었던 것 같긴 한데, 이미 만료된 지 오래됐기에 최대한 지원기간 안에 토익점수를 받기 위해 그 새벽에 바로 토익 접수를 했다. 운이 좋았다. 대기업 채용시즌에 겹쳤기에 당장 그 주 주말에 시험을 본다면 2주 만에 결과가 나오겠다 싶었다. 그전까지 입사지원서를 작성해 놓고 지원서 접수 마지막 날 토익성적표를 아슬아슬하지만 제출할 수 있을 거란 그림이 그려졌다.








밤새 설렘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아침이 오길 바랐다.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도는 담당 의사 선생님을 뵙자마자 퇴원시켜 달라고 졸랐다. 보통 나 같은 교통사고 환자들은 입원할수록 합의금도 많이 받을 수 있고, 아직 여러 사고 후유증이 남아있기에 며칠 더 있는 게 어떠냐는 말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꼭 퇴원하고 싶다고.' 답했다. 의지로 가득 찬 내 눈빛을 보셔서였을까 나는 그날 바로 퇴원수속을 밟았고 갑작스러운 퇴원 이유를 모르는 엄마아빠의 걱정과 만류의 눈빛도 보았다.   






병문안 왔던 친구가 찍어준 사진. 저기서 옷만 갈아입고 토익시험을 봤더랬다.





여담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스스로 혼자 하는 걸 좋아했다. 아이들도 서너 살부터는 '내가, 내가'를 달고 산다지만 그게 평생을 이어져 왔을 줄이야. 중고등학생 때는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어느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 찾아보고 알아본 뒤 엄마에게 학원비를 내 달라며 "통보"를 했던 적이 꽤 많았다.




07학번 수시 1학기 합격생인 나는 수능을 보지 않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적성검사'가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라 판단해 당시 인터넷에서 적성검사 문제들을 다 프린트하고 책으로 제본한 뒤 혼자 동영상 강의를 찾아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서점에서 몇 없는 문제집은 이미 다 풀어보았고 공부했지만 워낙 자료가 없던 탓에 스스로 만들어 풀며 갈증을 해소했다. 당시에 반 친구들은 쟤는 내신이나 수능 말고 희한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데, 8월 말에 대학교에 합격한 뒤로 내가 만든 문제집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나름 과외(?)를 해주기도 했다.   












결국 목과 허리에 보호대를 차고 토익시험을 봤다. 몇 년 만에 보는 영어 시험이라서 힘든 게 아니라, 끊어질 것 같은 허리와 목을 부여잡고 100분이라는 시간 동안 문제를 푸는 게 훨씬 괴로웠다.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만 봤지만 곳곳에서 목과 허리에 하늘색 보호대를 찬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그래도 목표가 생기니 행복했다.







퇴원했으니 방송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스케줄을 잡아 놓은 회사덕(?)에 바로 미팅과 방송을 이어갔다. 잦은 외근 사이에 사무실에 들어오면, 방송 보고서를 쓰며 지원동기와 입사 후 포부를 작성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내가 지원했을 땐 각각 500자 정도의 분량이라 부담 없이 써 내려갔다. 마치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처럼 내 이야기를 적어갔다.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그래서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수년간 노력했던 홈쇼핑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이제야 떠나보낼 수 있다는 마음에 후련하며 개운했다. 아직 결과가 발표난 게 아닌데도 나는 서류에 꼭 합격할 거란 자신이 있었다. 붙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아파서 쉰 목소리에 교통 사고로 띵띵 부은 얼굴, 그래도 웃으며 방송을 했던 어느 아침








자기소개서를 써 놓고 토익 점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영어 공부를 놓은 지 꽤 되긴 했지만 점수는 충격적 이게도... 610점. (나중에 입사하고 보니 동기들 중 내가 거의 최하... 이 점수는 입사하고 꾸준히 시험을 봐서 많이 올려놓았다.) 퇴원 다음 날 겨우 봤다고 변명하기엔 그래도 부끄러운 점수. 기준 점수인 550점에 감사하며 접수 마감 마지막 날, 성적표를 업로드하며 지원서를 마무리지었다.








(입사 후 포부)
저는 현재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6개 홈쇼핑 회사를 모두 돌아다니며, 한 달에도 수십 개의 방송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매 방송에 최상의 몸 상태로 출연하기 위해 평소에도 요가, 서핑 등 운동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기에 이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체력을 바탕으로 일하겠습니다.

보통 하나의 방송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합니다. 또한 실시간 생방송은 실수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동안 캐스터와 진행자로 일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배웠기에 ㅇㅇ항공의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이를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제가 해왔던 일은 모두 카메라 밖의 먼 고객들에게 진심을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승리를 바라는 마음으로 축구를 중계했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교통과 날씨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상품 구매 후 더 큰 만족과 감동을 위해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방송에서 보여줬습니다. 그랬을 때에 시청률과 매출로 보답받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소통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경험들을 되살려 이제는 직접 고객들과 소통하며 가까이에서 진심을 전달하겠습니다.



(지원동기)
10년 전 18살의 여고생은 쇼핑호스트를 꿈꿨고, 모든 삶을 홈쇼핑에 맞추어 계획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진심을 전달하는 쇼핑호스트가 되겠다는 다짐은 직접 홈쇼핑 방송을 진행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1분 1초가 돈이고, 매출이 인격이 되는 홈쇼핑에서는 진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직업을 결정하고 인생의 3분의 1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했기에, 제가 택한 길에 대해 또다시 치열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여행으로 탈출구를 대신했습니다. 처음에는 떠나는 즐거움에 보지 못했지만, 두 번, 세 번 여행하다 보니 객실승무원에게서 제가 찾던 진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통해서 고객에게 간접적으로 다가간 제 모습과 달리, 눈과 눈을 마주하고 직접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직업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와, 직업과, 자신과 직업이 만나서 생긴 가치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합니다. 다년간의 사회 경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왔기에 이제 행복해질 준비를 마치고 ㅇㅇ항공 객실승무원에 지원합니다.











이전 04화 겉으론 웃어도 속으로 울었던 20대 홈쇼핑 적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