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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미 Nov 26. 2023

내 생에 최고의 임원면접

즐겁다 못해 짜릿하기까지 했던 그날의 기억


드디어 임원 면접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십 수백 번의 면접 경험이 있었지만 유니폼을 입고 처음 해보는 면접이라 또 다른 설렘이 있었던 것 같다. 도착해서 유니폼 두 가지 중에 맞는 사이즈로 블라우스를 하나 골라 입고 도와주시는 분들의 안내에 따라 대기했다. 매 방송 콘셉트에 맞춰 준비된 방송의상을 입을 때완 또 새삼 느낌이 달랐다. 누가 볼세라 흔들리는 셀카를 몇 장 찍고 반은 졸며 반은 긴장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실 전날 새벽 2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바람에 5시간도 채 못 자고 청담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온 터라 비몽사몽 했었더랬다. 면접 전날 새벽방송이라 고단했지만 늦은 퇴근으로 인해 오후 출근 해야 하는 걸 면접을 위해 아껴둔 반차를 쓰고 아예 출근하지 않은 날. 피곤할지언정 운이 좋다 생각하며, 지금도 정말 감사하고 존경하는 지금은 유명한 메이크업 샵의 대표원장님이 된 ㅅ원장님의 예전 샵에서 부지런히 메이크업을 받고 왔다. 피곤함이 주체를 못 할 정도라 정신이 혼미하다 못해 차라리 조금 잘까... 고민했다. 애써 커피와 에너지음료로 잠을 깨려다 보니 오히려 각성상태가 되어서 방방 뜨는 느낌이라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아리송하기도 했다. (메이크업 샵을 이렇게 구구절절 적는 이유는 최종 면접에도 관계가 있기 때문!)










실무면접 다음으로 치러지는 면접은 유니폼을 입는다는 점, 영어 면접이 있다는 점이 기존과 많이 달랐다. 말했듯이 토익 점수가 처참했던 나는 당시 런던에 어학연수를 가 있던 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미리 내가 준비한 예상 문제들의 영어 답변을 편안한 말투로(딱딱한 한국인이 영작한 문법이 아닌 현지 사람들이 쓸 것 같은 표현으로 바꿔서) 바꿔서 달달 외웠더랬다.





저는 성대모사를 잘해요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비행기에서 기내 방송을 하면 다들 "방송을 너무 잘한다. 녹음된 걸 틀어놓은 줄 알았다."라는 말을 아주 가아아아끔 듣곤 하는데, 그때마다 성대모사를 잘할 뿐이라고... 너스레 떨며 얘기하곤 한다. 비슷하게 영어 면접도 그 억양과 강세를 그냥 그대로 익히며 마치 내가 영어를 정말 잘하는 척 빙의(?) 해서 했던 것 같다. (피곤해서 때려마신 음료의 카페인이 텐션을 올리기도 했고)







또 하나의 영어면접 준비 방법은 면접의 흐름을 나에게 끌고 오기. 스터디 친구들에게 얼핏 물어보니 처음엔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간단한 질문을 하고 그 이후에 실제 면접으로 넘어간다고. 또 건너 건너 들어보니 영어 면접을 담당하시는 직원분은 회사 직원 중에 해외 경험이 있거나 영어를 유창하게 매우 잘하시는 분을 불러서 면접 기간에만 면접관으로 근무하신다길래 '아 그분들은 실제 내가 생각하는 면접보다는 더 편안한 분위기 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도 덜 긴장하며 자연스럽게 흐름을 바꿔봐야지'라고 생각했다. (본인 일도 바쁜데 차출돼서 면접에 지원되는 회사원의 마음은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임원 분들처럼 매의 눈으로 볼 것 같지 않았기에...)









오늘 네 기분이 어때?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 보통 첫 시작은 기분은 어떠니 컨디션은 어떤지 등등을 물어본다고 해서, 그 질문을 시작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로 이끌어 나갔다.






단답형의 답변이 아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변으로



"떨려"에서 끝이 아니라,   "긴장되고 피곤하지만 조금은 신나!" 이게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왜 신나는지를 물어볼 거란 생각이 있었기에 그 이후론 내가 준비한 답변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사실은 나는 홈쇼핑 방송을 하는 사람인데 어제 자정 넘어서 생방송이 있었거든, 사실 오늘 인터뷰 앞두고 얼마 못 자긴 했는데 어제 매출이 좋아서 신났어. 그리고 이렇게 유니폼 입는 면접도 처음이라 설레기도 했어.






여기에 대한 꼬리 질문이 이어졌다. 다 내가 준비한 질문들. 무슨 제품을 파니,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그럼 왜 이직하려고 하니, 왜 그럼 항공업계로 옮기는 거고 왜 우리 회사니 같은... 그래서인지 나름 유창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속으론 엄청 떨렸고 마치 내 토익점수가 600점 대 인걸 이마에 써 붙이고 면접 보는 느낌이라 위축되기도 했기에 차라리 연기를 했다. 그 짧은 순간 만이라도 마치 내가 토익 만점인 것처럼. 그랬더니 길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던 시간이 즐겁게, 짧게 끝나버렸다.








드디어 임원분들 앞에 섰다. 임원 면접은 몇 번 경험이 있었지만, 역시나 오랜 경험의 매의 눈으로 면접자를 대해 온 분들 앞에 선다는 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봤다. 이번 승무원 공채에 떨어져도 나는 다시는 항공사에 지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누구나 3, 6, 9의 고비가 있다고 한다. 이 연차가 되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지는 충동적인 마음이 매일의 회사 생활을 지배하는 일.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사회경험이 길 수록 나이가 들어서인지, 용기가 없어져서인지 새로운 곳으로의 이직이 망설여진다.







사실 승무원 공채 1년 전 모 종편 방송에서 연락이 왔다. 예전에 채널 개국 당시 기상캐스터에 지원했었는데 떨어졌던 방송국이었다. 이번에 새롭게 아침 방송으로 기상과 교통 모두를 할 수 있는 캐스터가 필요한데 내 이력서를 제출한 기록이 있었기에 연락한다는 것. 꽤 큰 채널이고 대우도 좋게 해 준다는 말에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래도 이름 있는 곳의 생방송 캐스터로 근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사회 경험이 많은 아빠와도 많은 상의를 했지만 결론은 스테이 하기로. 이미 머리가 커져버린 나는, 힘들지만 지금의 정규직 생활이 프리랜서보다는 보호받을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해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매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가기엔 무서웠다.





채미는 내 딸이니까. 물론 그것도 좋은 제안이겠지만 아빠는 채미가 다시 정글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말리고 싶어. 



아빠의 이 말씀이 머무르게 되는 더 큰 이유가 됐다. 그 이후 홈쇼핑 일이 힘들 때마다 문득 내가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더 오래 여운이 남는다는 걸 그때 배웠다. 물론 날 사랑하는 아빠의, 부모의 마음이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망은 꽤 잔잔하게 오래 남았다.









그래서 이번 임원 면접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절실하지는 말자고 계속 되뇌었다. 홈쇼핑 공채에서는 항상 너무 온 힘을 다해 바랐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서.




힘을 빼고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을 하니 “즐기면 되겠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마치 파도를 가르는 서퍼의 마음으로 짜릿하게 매 순간을 즐겨보자며 임원 분들 앞에 섰다.










이 다짐이 무색하게도 첫 질문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첫 질문은 공통질문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내가 지원한 회사는 TV CF를 방영하고 있었다.  ‘당신의 여행 스타일은 무엇인가요?’라는 캐치프라이즈를 쓰고 있었는데 그 광고를 인용하며 각자의 여행 스타일을 물어보는 질문이 이어졌다.






회사의 광고를 보면 당신의 여행 스타일은 무엇인지 물어보는데 지원자 각각의 여행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신기하게도 임원 면접을 보러 간 다섯 명 중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어서 운이 좋다 순간 생각했지만, 다른 지원자들의 답변을 또 안 들으면 안 되기에 귀로는 그들의 대답을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내가 말할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임원 분은 분명 ‘지원자의 여행 스타일’을 묻는 건데, 답변이 다들 산으로 가고 있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는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가족들과 함께 ㅇㅇ항공을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습니다. 승무원이 되면 비행기 티켓이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ㅇㅇ항공의 승무원이 되어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 이 첫 답변을 시작으로 그 이후 마치 본인이 제일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지원자들의 자극적인 답변이 이어졌다. 그중 할머니가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하셔서 승무원이 되어 할머니를 꼭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며 울먹이는 친구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내 기준에 질문에 맞는 답변을 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왜지? 왜 이런 말을 하지? 골똘히 생각하던 중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 답변은 간단했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되살려 보면)




저는 활동적이고 많이 움직이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지난 여행을 돌이켜 보면 혼자일 때나 누구와 함께일 때나 항상 동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혼자 대만여행을 갔을 땐 매일 하루에 2만 보 정도를 걸었고, 사실 제가 친구와 방콕 여행을 갔다가 어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방콕 시내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들어가면 아유타야라는 우리나라 경주 같은 곳이 있는데 들어보셨나요? 이곳에서 네다섯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며 그 마을을 신나게 보고 여행하고 왔습니다. 이런 걸 볼 때 제 여행 스타일은 활동적이고 그곳의 문화를 많이 보고 느끼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아유타야에서 내가 빌린 자전거





고개를 끄덕이는 임원 분들의 표정을 보았다. 그 이후였을까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고 잠을 못 자 흐릿하던 정신이 좀 또렷해졌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임원 면접인데 즐겁기 시작하다니. 아 이게 남들이 그렇게 말하던 면접을 즐기는 느낌이구나. 공통 질문 이후 이어질 개별 질문에서도 이 느낌과 기분을 그대로 이어가려고 흥을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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