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준생이 뭔가요? 전현차가 뭔가요?
퇴원과 함께 방송 스케줄은 다시 잡혔다. 며칠 더 입원할 수 있었지만 출근해서 틈틈이 쓴 지원서를 제출하고, 다시 방송을 하는 직장인으로 몇 주를 살았다. 정신 차려보니 면접 전형이 시작되었다. 승무원 공채도 쇼호스트 공채처럼 꽤 긴 전형으로 이루어지는데, 쇼호스트와 다르게 승무원은 대부분 서류합격을 시켜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원했을 땐 1만 2천 명 정도가 지원했고, 9천 명 가까이 면접을 봤다고 들었다. 당시 최종 합격은 200여 명 정도였고, 80명 좀 넘는 동기가 생겼다)
서류합격 -> 1차 실무면접 -> 2차 임원면접 (유니폼 착용) -> 3차 최종면접 (유니폼 착용) -> 체력검사 및 신체검사 -> 최종합격 -> 인턴으로 2년 근무 -> 정직원 전환
서류 다음은 실무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방송이 있는 날 면접이 잡혔다. 평소 같으면 좋은 컨디션으로 면접을 보고 싶어서 속상한 마음으로 방송 스케줄을 빼려고 어떻게든 노력했을 텐데, 헤어와 메이크업을 따로 받지 않고 면접 볼 수 있겠네! 방송 시간이랑 겹치지도 않고 끝나고 이동하면 되니까 오히려 좋다! 라며 긍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 밝은 마음 덕분인지 홈쇼핑 때와 다르게 실무 면접에서 나름(?) 압박 질문을 받았지만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채미 씨는 지원할 때 제출한 사진이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좀 특이한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입사 지원했을 때 내가 제출한 사진은 모두들 흔히 아는 승무원 증명사진이 아니었다. 핑계를 대 보자면 승무원 증명사진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파란 배경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쪽진 머리를 한 사진을 새로 찍을 시간이 없었달까. 다행히 3달 전쯤 모 홈쇼핑 공채를 망치고(?) 심기일전하기 위해 프로필사진 찍은 게 꽤 잘 나왔다 생각되어 지원서에 맞는 크기로 사진을 잘라서 냈다. 그 사진엔 연갈색 긴 웨이브 머리, 코랄색 어깨뽕 원피스, 화려한 귀걸이에 살짝 턱을 치켜들고 옆모습을 강조하는 모습이 문제였다면 문제.
워낙 승무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사전 지식도 없어서 남들 다 내는 증명사진이 아닌, 그냥 내 사진을 제출했다. 그래서 답변도 나답게 마무리지었다.
제가 지원 요강을 찾아보니 사진의 용량, 사이즈에 대한 규정은 있었는데 제가 어떤 헤어와 메이크업을 했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 중 가장 저답고 예쁜 사진을 제출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당시 이 대답을 했을 때 면접관 분(아마도 인사팀 직원이셨던)의 고개가 끄덕이는 걸 보고 '사진을 찍어서 냈어야 했나? 하지만 시간이 없었는 걸... 뭐 이미 내버린 사진, 이제 와서 어떡할 거야?' 라며 맞는 말을 했으니까 수긍하신 거겠거니 생각하며 별 개의치 않고 넘겨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스터디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엄청난 사진을 제출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당시 나는 '전현차'라는 다음카페에 가입해서 공채를 같이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 스터디에 함께 하기까지도 꽤 난관이 많았는데, 서류를 제출한 후 면접준비를 해야겠다 싶어서 카페 가입 후 등업도 하고 스터디에 들어가고 싶어 쪽지를 보내면 다 '거절' 당했기 때문이다. 거절의 이유는 명확했다.
28살. 키 161cm. 그동안 승무원 공채경험 전무. 토익점수 600점 대... 내 스펙을 적어 보내면 백이면 백, 나이가 있는 편인데 면접 경험이 없어서 본인들과 함께하기는 어려울 거란 답변이 돌아왔다. 마치 무슨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들을 만한 말을 듣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도대체 승무원 준비생이 뭔데 이렇게 승준생 되기가 힘든 건데!'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를 받아 준 유일한 스터디가 있었다. 스터디 모집 글을 보고 이번에도 역시나 거절당하겠지 그러면 그냥 방송도 많고 찮은데 실무면접도 보러 가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보낸 문자에 이번 주 주말, 강남역 스터디 카페로 몇 시까지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친구가 스터디의 장. 나랑 동갑인 친구 한 명.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까지. 우리 스터디는 나이가 꽤 있는 모임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날 반갑게 맞이해 줬고, 나는 그곳에서 면접을 앞두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승무원 준비생들의 면접을 배울 수 있었다.
흰 실크 블라우스와 검은 H-라인 치마(일명 모나미룩), 진주 귀걸이, 가죽 줄 손목시계... 네?!
유니폼을 입는 임원 면접과 최종 면접과 달리 실무 면접에서는 본인이 직접 의상을 준비해 와야 했다. 알아보니 일반적으로 진주 단추가 달린 실크(처럼 보이지만 나일론 소재의)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검은색 무릎까지 오는 붙지 않는 스커트, 귀에는 진주 귀걸이. 여기까지 들었을 땐 그래도 뭐 적당히 촌스럽고 단정하니 괜찮겠네 라는 생각을 했지만 '가죽 줄의 손목시계'를 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실무면접 안내에는 시계를 차라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 친구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은 거지 내내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행기에서는 응급 환자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물론 기내에 자동혈압계를 비롯한 여러 의료장비가 많지만 가장 손쉽게 승객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초침이 있는 아날로그시계이기에 이러한 면접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던 것. 물론 수능도 안 봤고 수능 시계라고 산 건 은색 카시오의 전자시계뿐인 나는 친한 친구의 갈색 가죽 줄 아날로그시계를 빌려 면접을 보기로 했다. (홈쇼핑 공채 때는 수십만 원, 백만 원 넘게 돈을 쓰며 마치 돈을 아끼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승무원 공채를 겪을 땐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내 마음과 내 답변이 더 중요하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터디에서 배운 것처럼 흰색 실크 블라우스(회사 퇴근하고 신촌에 가서 급하게 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방송엔 승무원들처럼 무난한 진주 귀걸이를 보통 안 하기 때문에, 큐빅이 왕관 모양으로 달린 진주 귀걸이(이게 그나마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얌전했음)를 끼고. 친구가 빌려준 아날로그시계까지 차고. 방송을 마치고 오느라 다른 면접자들과 달리 번 헤어(일명 똥머리)가 아닌 포니테일로 면접을 봤던 그때.
지나고 보니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건 면접을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 그때 당시 홈쇼핑 쇼호스트 공채를 볼 때처럼 '이거 아니면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아닌 '재밌는 경험이니까 한 번 즐겨봐야지'라는 마음이 실무 면접 합격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 아무리 홈쇼핑 공채를 하며 수백 수천 번 들어도 할 수 없던 즐기는 마음. 승무원 면접을 보며 내내 재밌고 짜릿했던 기억을 되살려보니 이게 내 길이었기에 면접 과정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다. 혹은 방송 경력을 쌓으며 수십 수백 번 보았던 면접들이 승무원 공채 때 빛을 발했을 수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무 면접에 합격했고, 소중한 스터디 친구들과 함께 임원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